식물 6

블루스타펀 고사리와 이끼

생각해 보니 제주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고'로 시작된다. 블루스타펀 고사리 얼마 전 분갈이 작업장에서 내가 키우기 위해 심어놓은 식물이 있다. 포자로 번식하는 양치식물이며 고사리과에 속하는 블루스타펀 고사리이다. 도매손님이 없는 한가한 토요일 날 같은 동의 매장에 들러 한 포트만 사 왔다. 실버레이디, 푸테리스, 더피 고사리, 보스턴 고사리, 후마타 고사리, 하트 고사리, 아비스 등 많은 고사리과 식물을 식재해 봤지만 이상하게도 블루스타펀 고사리만 심을 일이 없었다. 잎의 색깔이 오묘한 청록색이고 햇빛이나 환경에 따라 조금씩 색의 차이가 있는 듯했다. 포트를 들어 이미 망가지고 상처 난 잎은 모두 잘라버렸다. 녹소토와 질석을 약간의 상토와 배합해 분갈이 흙을 만들어 심을 준비를 했다. 화분은 투명한..

나의 관찰일지

무료한 일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새벽에 잠깐 깰 때마다 찬바닥이 몸을 움츠리게 한다. 확실히 차가운 영하가 오고 있다. 일하는 매장에 새로 들어온 알바생이 있다. 의욕도 넘치고 최선을 다하려 한다. 나는 그에게 그동안 배우고 체득한 일하는 방법을 전수해주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별 의미 없는 기술이지만 먹고살아야 하는 자에게는 당장에라도 필요한 기술과 일하는 감각이다. 일하는 방법과 차례 등을 지도해 주면서 나도 모르게 달라진 내 모습을 눈치챘다. 일 배우는 자에게 모범이 되고 올바른 태도를 보여주고자 나는 평소와 다르게 먼저 앞에 나가 적극적이고 자신감 있게 일하고 있다. 손님들에게 더 먼저 많이 인사하고 매장에 한 발을 내딛도록 안내를 한다. 수년 동안 머리와 몸으로 체험하여 얻은 식물에 대한 ..

과천 서울대공원 그리고 식물

동물도 좋고 식물도 좋다. 글을 쓰려고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몸담았던 곳들이 굉장히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20대 초반에 나는 공익근무요원으로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근무를 하게 됐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안전사고 예방과 관람객과 동물의 접촉을 막는 일들이었다. 초식동물이라고 해도 우리 안에 가둬진 동물의 본능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근무하던 기간에도 많은 사고들이 있었다. 당시 뉴스에도 보도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일로 인간의 잔혹함을 깨달았었다. 자폐아 자녀와 함께 동물원에 놀러 온 부모가 코끼리 우리 안에 자식을 던져버린 것이다. 이 당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이는 크게 다치지 않았고 부모는 뜻하지 않은 사고였다고 했다. 그 후 조사 결과는 부모가 자폐아 자녀를 통해 보험금을 노..

추운 겨울 월동하는 사람

나는 정말로 추운 게 좋다. 덥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꾸물한 날씨다. 매장에서 한가로이 있을 즈음 한 손님이 들어와 물었다. "월동 가능한 식물이 있나요?" 월동이 가능한 식물은 많다. 한국의 기후를 견뎌내는 자생종이나 야생화등이다. 하지만 그런 식물은 가을이 깊어져야 시장에 나오고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매장에 진열된 식물들도 열대식물들 위주라 추워지는 겨울이 되면 모두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야 한다. 실내에 있더라도 습도를 맞춰주지 않으면 말라죽거나 병에 걸린다. 월동 가능한 식물이라도 작은 화분에 심어진 어린아이 같은 개체들은 추운 겨울을 밖에서 이겨내지 못하고 얼어 죽는다. 땅에 심겨 대지의 기운을 받거나 어느 정도 목대가 굵어진 식물들만 봄을 볼 수 있다. 손님과 몇 마디를 더 대화하고 나는 다시 ..

제주는 나를 기른다

나는 식물이었다. 식물을 심는 일은 꽤나 집중을 필요로 한다. 식물의 앞을 보아야 하고 나에게 등 돌리지 않은 얼굴을 찾아서 다듬어야 한다. 찢어지고 상처 입은 잎을 잘라주고, 햇빛을 가리는 오래된 잎과 바람의 길을 막는 울창한 가지를 잘라 길을 내어준다. 조심히 식물과 플라스틱 화분을 분리하고 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밑을 받쳐서 준비해 놓은 이쁜 화분에 옮긴다. 식물이 흔들리지 않도록 배수가 잘되고 무게감이 있는 흙을 골고루 화분에 채워 넣어 중심을 잡아준다. 양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서 빈 공간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 흙 위에 마사를 올려 전체적으로 정리를 한 후 물을 뿌려서 잎사귀의 먼지와 화분의 흙을 씻긴다. 물구멍으로 물이 빠지면 들어서 바람과 햇살이 지나다니는 장소에서 안정을 ..

어쩌면 제주의 시작은 게임이었다

난 식물과 관련된 일을 한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인생이 이렇게 풀렸다. 이 일을 계속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는 본업이고 노동으로 얻는 유일한 수입원이다. 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된 걸까? 시작은 아주 사소했다. 내가 백수였던 어느 날 그가 내게 재밌는 게임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게임의 이름은 듀랑고. 공룡들이 존재하는 가상의 세상에서 농사를 짓고 사냥도 하며 건축을 하는 게임이었다. 돈을 모아서 자신의 땅을 더 확장시킬 수 있었고 나는 땅에다 옥수수, 벼 등 농작물을 가득 심었다. 게임이었지만 농작물을 기르고 추수하는 재미에 푹 빠졌고 그야말로 농사꾼이 되었다. 건축과 공룡 사냥, 정글탐험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농사뿐이었고 탐험을 하는 이유도 퀘스트를 깨서 레벨업을 하거나 새로운 농작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