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활주로는 제주로

제주 걱정

낮가림 2022. 2. 2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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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하루 종일 걱정에 둘러싸여 산다.
머릿속 크고 작은 걱정들이 소중한 내 시간들을 잡아먹는다.
출근하기 전 나는 가스밸브의 방향을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본다.
그리고 가스레인지의 손잡이들을 모두 하나씩 일일이 만져본다.
눈으로만 봐도 확인이 되지만 보이는 것만을 믿지 않는다.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안에 든 물건들을 하나씩 만져본다.
분명 눈으로 보지않고 그 물건의 크기, 촉감, 무게, 위치 순으로 확인한다.
물건의 위치가 바뀌어 있으면 손으로 다시 완벽한 위치를 찾아 준다.
가방 속에는 빗, 지갑, 교통카드지갑, 버즈라이브 무선이어폰 케이스 밖에 들어있지 않다.
고작 몇 가지의 물건을 확인하느라 온 신경을 손의 촉감에 집중한다.
모든 물건의 생존을 확인하고 나면 문을 열고 출근 길을 나선다.

동네 골목길을 한참 걷다가 갑자기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내가 아까 바지를 입었었나?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아래를 쳐다본다.
움직일 때마다 바지의 안감과 나의 피부가 마찰해서 느껴지는 촉감과 검은 바지의 모습을 확인했음에도 약간의 미심쩍음을 느끼며 다시 빠르게 걷는다.
지하철 역사 입구에 가까이 도착했을 때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가방의 겉면을 더듬는다.
작은 가방이기에 안에 든 물건이 겉으로 만져도 조금씩 느껴진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도착한다.
난 다시 한번 가방의 덮개를 열고 손을 넣어 물건의 개수와 순서 그리고 위치를 손으로 만져보고 확인한다.
이 모든 과정이 직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몇 번이고 반복된다.
직장에 도착 후 나는 필요한 물건 두개를 책상 위에 꺼내놓는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손으로 잡고 눈으로 확인한다.
난 분명 눈으로 보고있지만 내 시각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몇 번 더 눈으로 확인하고 물건의 무게를 확인한 후에 가방 속으로 넣고 덮개를 잠궈 퇴근 전까지 봉인한다.

왜 난 이런 일련의 반복적인 습관들을 가지게 되었을까?
안전과 도난에 대한 걱정이 많은 걸까.
깊은 곳 무의식에 이런 걱정들이 배어든 걸까?
이것 외에도 사소한 걱정 습관들이 정말 많다.
직장에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많은 걱정 습관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소지품을 체크하는 버릇 때문에 물건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눈으로 보고도 손의 만져짐으로 확인해야 이 물건이 허상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는다.
귀신을 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런 나에게 작년부터 새로운 걱정들이 생겼다.
제주에 대한 걱정이다.
두가지로 나뉘는데 말 그대로 제주에 대한 걱정이다.
작년에 비가 많이 내려 제주의 많은 집들이 침수되었다.
골프장 건설로 제주의 자연환경과 곶자왈의 생태계가 위협받는다.
코로나로 제주의 관광산업과 항공산업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렇듯 나의 머릿속에는 제주에서 일어나는 현실에 대한 걱정이 밀려들어왔다.

다른 하나는 나에 대한 걱정이다.
내가 진짜로 제주에 갈 수 있을까?
돈이 얼마가 모여야 제주도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제주에서 내가 원하는 집을 찾거나 고칠 수 있을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리고 일어난 현실의 일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서로 합쳐진다.
비가 많이 내려 집들이 침수되었는데 나는 침수되지 않는 집을 찾을 수 있을까?
환경파괴로 곶자왈이 위협받고 있는데 관련 단체에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코로나가 끝나고 또 다른 팬데믹이 온다면 제주에서의 나의 삶과 사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들의 콜라보가 올바른 대비와 멀리 생각하는 안목을 만들어줬다.
어쩌면 걱정의 순기능인가?
물론 이 모든 건 제주에 진짜로 갈 수 있느냐다.
내 걱정의 루틴대로라면 손으로 촉감을 느껴야 걱정을 끊을 수 있다.
주기적으로 의심의 불꽃이 피어오르지만 그때도 걱정의 루틴대로 하면 다시 잠재울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으로 제주도를 볼 수 없다.
더더구나 만져서 확인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안에 제주로 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길 수 있을까.

답은 뻔하다.
그냥 가서 두 눈으로 제주를 확인하고 돌담을 만져보며 불어오는 바람을 피부로 느끼는 것이다.
어차피 봐도 못 믿을 거면 그냥 눈을 감고 느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갈 수 없다.
만약 내 걱정의 루틴대로라면 촉감으로 보고 만지면 불안은 사라진다.
제주의 크기, 촉감, 무게, 위치를 손으로 확인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무슨 수로 귤 하나만 겨우 움켜쥘 작은 손으로 제주를 만져서 확인한단 말인가?
난 나만의 제주를 만들기로 했다.
가방 한켠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제주.
어떤 형태의 물건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늘 넣어 갖고 다닐 것이다.

제주에 대한 나의 꿈이 걱정될 때 난 조용히 루틴의 순서대로, 가방 속에 손을 넣어 나의 작은 제주를 찾을 것이다.
제주의 크기, 촉감, 무게, 위치를 손으로 확인하고 난 제주가 있음을 확신한다.
어쩌면 걱정을 역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에 생각을 꼬리 물다 보니 영화 인셉션이 생각났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도 꿈과 현실을 구분 짓기 위해 카펫의 재질을 만지거나 자신만의 토템을 만들어서 무게를 느낀다.
본인만 알 수 있는 촉감과 무게를 정해놓은 것이다.

어서 빨리 나의 제주를 찾아봐야겠다.
불안이 시작될 때 그것을 만지면 걱정은 멈춘다.
그 즉시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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