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활주로는 제주로

메타버스 제주

낮가림 2022. 2. 20.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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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이다.
아직 퇴사가 아니다.
그냥 흔한 퇴근이다.
날씨가 서늘할 때는 해도 같이 퇴근하느라 좀처럼 마주칠 일이 없다.
집에 도착하면 완전히 컴컴한 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동으로 불이 켜지고 외출 중으로 설정해놨던 방 온도가 올라간다.
스마트 시스템이란 간편하고 좋은 것이다.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니까.
얼음같이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고 양말을 벗어 세탁통 안으로 던져 넣는다.
답답한 겉옷과 사회에서 어른이라 겉치장한 체면과 자존심까지 서둘러 벗어버린다.
이제 몸에 걸친 건 속옷과 며칠 동안 쌓인 피곤뿐이다.
웬만해선 피곤은 벗겨지지 않는다.
마치 물에 젖은 양말처럼.
힘겹게 벗은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른 후에도 피곤의 무게는 남아 몸 한구석에 걸치고 있다.

한껏 게을러진 몸으로 소파에 천천히 몸을 붙인다.
내 무게에 피곤의 무게가 합해져 쿠션이 푹하고 바닥으로 꺼진다.
고개를 들어보니 테이블 위에는 메타퀘스트가 올려져 있다.
피곤했던 어젯밤에도 메타퀘스트를 쓴 채로 거실에서 걷다가 지쳐 잠들어 쓰러졌다.
역시나 습관처럼 메타퀘스트를 집어서 얼굴에 착용한다.
후속 기기가 나올수록 무게는 점점 가벼워지고 기능은 진화되었다.
고감도 센서가 적용된 광섬유로 만들어진 장갑에 손을 맞춰 넣는다.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옷을 벗어던지고 다시 무언가를 입는 게 일상이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본다.
피곤이 소파에 달라붙어 몸을 일으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느릿느릿 일어나서 거실 한가운데로 걸어간다.
거실 바닥이 미끄럽다.
아까 양말을 벗은 게 살짝 후회된다.
들뜬 목소리로 구글을 호출하고 어스를 불러온다.

좁았던 시야가 확장되고 천장이 푸른 하늘로 변한다.
미끄럽던 거실 바닥은 이끼 낀 거친 보도블록으로 바뀌었고 아까 집어던진 양말은 다시 신은 채로다.
눈앞에 거대한 평상이 보인다.


어젯밤 걷다가... 아니 낮인가?
어쨌든 동네를 걷다가 평상에 앉아서 쉬었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알람 소리에 깨었을 때는 평상 위에 누워있었고, 현실에선 거실 바닥에서 깨어났다.

여기는 내가 자주 찾는 제주 한경면 청수리 마을.
그리고 동네 길가 한가운데에 위치한 커다란 평상이다.
평상에 올라가 발을 쭉 피고 습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착각이 아니라 진짜 청수리의 여름날 습한 공기다.
아마도 거실의 가습기가 자동으로 작동되었나 보다.

몇년 전 외국의 한 프로그래머가 구글맵을 그대로 긁어와서 가상의 지구를 복제해냈고, 하이퍼 리얼리즘 기술을 통해 거의 실제와 같은 가상 환경을 만들어 냈다.


그는 전 세계의 땅을 NFT로 만들어 판매했고 가상 부동산 시장의 거물이 되었다.
하지만 오픈 초기 많은 중국인들이 전 세계 유명 도시 랜드마크와 관광지를 선점해 버렸다.


제주의 땅도 마찬 가지였다.
외국인들이 대부분의 관광지와 오름 정상, 해변가를 소유해서 부동산 가격을 올려버렸다.
실제 그곳에서 비즈니스를 하거나 관광사업을 하는 이들은 메타버스 공간에서 자신들의 브랜드와 건물을 되찾기 위해 비싼 값을 치르고 토지와 건물을 구매해야 했다.
제주시에서도 관광지의 입구나 주요 포인트를 외국인들에게 비싼 월세를 내며 임대해야 했다.
매년 메타버스를 통해 제주로 관광을 오는 인구가 해마다 늘었고 이 가상 지구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가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평상 위에 혼자 앉아있다.
잠시 공간에 적응하고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것은 명상이다.
가상의 공간에서 명상이라니.
하지만 도시에서 명상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 메타버스 세상이다.
좁은 방안보다 시야가 확장된 실제와 같은 환경에서 조용히 방해받지 않고 명상을 하는 것이다.
현실과는 반대로 이곳의 시간은 낮이기에 출근한 해를 볼 수 있다.
시차가 한국과 정반대인 지구 뒤편의 세상.
오늘은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조용하다.
명상하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다.

담 뒤편에 감춰놓은 작은 상자를 꺼냈다.
흙을 털고 상자를 연다.
상자 안에 또 다른 형태의 메타퀘스트가 들어있다.
메타버스 안의 메타퀘스트는 현실의 장비보다 훨씬 가볍고 단순하며 사이즈가 작다.
아주 고가의 장비이고 어디에 숨겼는지는 소유자만 알 수 있다.
난 메타퀘스트를 꺼내 얼굴에 쓰고 장갑을 꼈다.
현실에서 메타버스로 점프하고 다시 메타버스 공간에서 무의식으로 점프하게 된다.
두 개의 메타퀘스트를 이중으로 착용하고 더 깊은 곳으로 갈 준비를 한다.
이제 나의 무의식으로 들어가 명상을 할 수 있다.
간단한 음성명령으로 기계가 작동하고 난 더 깊숙한 세상을 보게 된다.

어둡다.
작은 집안에 들어와 있다.
거실 한가운데에 속옷만 걸친 채 메타퀘스트를 쓰고 맨발을 움츠린 채 바닥에 앉아있는 한 중년의 남자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남자를 찬찬히 살펴본다.
흰머리카락과 작은 주름들이 안쓰럽다.
거실의 가습기가 너무 세게 작동해서 남자의 얼굴과 기계의 겉면에 작은 물방울이 맺혀있다.
상체는 옷을 걸치지 않았음에도 무게를 느끼는지 어깨가 축 내려가 있다.
동정심에 굳어진 남자의 어깨를 힘주어 주물러 준다.
남자는 순간 소름이 돋았는지 어깨를 움찔했고 피부에 닭살이 돋아난다.
이런 사례가 가끔 있다고 들었다.
집안에 설치된 AI카메라가 사물과 생명체를 실시간으로 스캐닝해서 무의식에 침범한 가상의 메타퀘스트에 전송한다.
잠시 육체가 잠든 현실의 유저는 갑작스러운 외부의 소리나 신체접촉을 고스트 현상으로 착각한다.
집안에 귀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유저가 현실로 돌아오면 무의식에서 있었던 일들을 대부분 꿈처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놀랐을 남자에게 미안한 마음에 거리를 둔다.


나는 알고 있다.
남자가 제주에 가 있다는 걸.
이 남자는 매일매일 어두운 거실에서 가상의 제주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불쌍한 남자다.
자신이 살고 싶은 지역도 구글맵에서 찾아다니며 정했다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에도 이 남자는 진짜 제주를 찾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아직 본인이 목표한 경제적 자유를 달성하지 못했다.
남자는 알고 있다.
지금 일을 관두고 제주로 내려가서 살면 언젠가는 경제적 이유로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하고 그 한 번의 실패가 끝이라는 걸.
남자는 변명처럼 메타버스 속 제주로 가는 것이 실제 제주로 가기 위한, 가장 강력한 시각화 방법이라고 친구에게 자주 말을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이미 일찌감치 제주에 내려가 터전을 잡고 살고 있었다.
친구가 보내오는 제주의 사진을 보면서 그는 제주를 그리워했다.
남자는 어스의 가상 부동산을 사서 친구에게 증여했다.
친구가 살고 있는 제주의 집터였다.
친구가 보내주는 사진에 대한 보답이었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는 시체처럼 온몸이 굳어있다.
너무 오래 가상공간에서 현실로 점프하면 뇌가 착각을 하게 되고,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메타퀘스트 3단계 착용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해킹으로만 기계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더 지체하면 남자의 몸을 둘러싼 피곤의 무게는 더 증가할 것이다.
명상을 통해 나를 지켜보고 위로한다.
어스에서는 전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는데도 바보같이 제주에만 머무르는 남자.
참으로 우직하고 한편으론 진짜 제주로 갈 용기가 없는 남자다.
자아성찰을 끝냈으니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뒤돌아 자신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건넨다.


"떠날 수 있을 때 제주로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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