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주로 가는 건 비밀이다.
친구인 그 외에는 가족이나 주변 지인 그 누구도 모른다.
심지어 제주도 모르고 있다.
조심히 비밀스럽게 마흔이 넘은 어느 날부터 아무도 모르게 일탈을 꿈꾸고 계획 중이다.
사람이 사는 장소와 환경을 바꾼다는 건 거의 모든 걸 바꾸는 거라 생각한다.
지금은 예측할 수 없지만 내가 딱히 애쓰지 않아도 생길 무의식적인 습관도 만들어질 것이고 타지에서 온 이방인이 갖게 되는 방어기제도 생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만큼 제주를 이해하고 편견을 갖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제주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하려 노력 중이다.
또한 왜 제주에 정착했다가 다시 돌아오는지도 자세히 알아보려 한다.
모든 걱정되는 고민거리에 대한 계획을 다 세워놨을 때 정말 어느 날 아무 걱정 없이 짐을 싸서 김포공항으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상도 해본다.
난 제주행 비행기 창가 쪽 좌석에 앉아서 이륙을 대기 중이다.
그에게 오늘 간다는 간단한 메시지를 보낸다.
아직 자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거대한 존재가 먹물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흰구름에 어두움이 번져간다.
후드득 소리와 함께 유리 창가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다.
응? 오늘 일기예보에 비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스마트폰을 꺼내 날씨를 확인해본다.
갑작스러운 기상악화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 빼고는 아무도 이륙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 듯하다.
심지어 승무원도 미소만 지은채 통로 쪽 입구에서 대기 중이다. 혼란스럽다.
아... 오늘이 제주 가기에 딱 좋은 날씨였는데.
집에도 어디 놀러 갔다 온다고 긴 인사를 하고 왔는데.
잠깐 내리고 지나가는 소나기겠지.
밝은 햇살을 기대하며 자리에 앉아 사진이나 몇 장 남겨본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비는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슬슬 이상한 느낌이 온다.
잠시 후 안내방송이 나온다.
오늘 제주행 비행기는 기상악화로 모두 취소됐다고 한다.
마음은 쓰리지만 그래 하루 정도는 미뤄져도 상관없지.
나는 짐칸에서 짐을 내리고 차례대로 줄을 서서 비행기에서 내린다.
우산이 없으니 손등으로 간신히 얼굴만 가린 채 대기 중인 버스에 올라탄다.
하늘을 본다.
하늘이 점점 더 시커멓게 짙어지고 있다.
아쉽지만 오늘은 아니다.
집에 도착한 나는 다음 날 날씨를 확인하고 가장 빠른 비행기로 예약한다.
다음 날 어제와 똑같이 창가 쪽 좌석에 앉아 흥분되는 마음을 즐기는 중이다.
이제 한 시간 후면 제주에서의 긴 삶이 시작된다.
이륙 준비를 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나는 안전벨트를 단단히 맨다.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진동으로 느껴지고 잠시 눈을 감아 이 날을 위해 준비해 왔던 오랜 시간들을 뒤돌아 추억해본다.
경제적 자립과 나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했던 수많은 노력들.
감히 시도할 상상조차 못 했던 과감한 실행과 결단력들.
난 얼마 전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순간적으로 큰 빛이 나를 감싸고 제주행에 기운을 실어주는 듯하다.
갑자기 천둥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놀라서 눈을 떠 하늘을 보니 거대한 먹구름이 해를 집어삼키고 있다.
아니 왜... 갑자기?
큰 빛은 눈을 감고 있을 때 생긴 번개였나 보다.
다시 빗방울이 떨어진다.
나의 기대감까지 빗물에 젖어간다.
날씨를 확인해본다.
또다시 예상치 못한 기상악화다.
오늘도 제주행 비행기는 뜨지 않는다.
다음 날도 모래도 비행기가 이륙하려 하면 날씨가 사악해진다.
나는 점점 지쳐간다.
마치 김포공항으로 매일 출근을 하는 모양새다.
제주행 기내 안이 내 사무실이고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으로 퇴근한다.
한 달이 지났다.
매번 날씨는 좋다고 나오지만 비행기는 뜨지 못한다.
내가 오늘도 비행기는 뜨지 못했다고 소식을 전하면 그는 내일이 있으니 힘내라고 위로해준다.
오늘도 날씨가 좋다.
그러나 난 공항으로 가지 않는다.
바로 항구로 가서 제주행 배에 올라탔다.
하늘이 안된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바다로 갈 것이다.
그에게도 연락을 했다.
오늘은 배를 탄다고.
파도가 잔잔하다.
느리지만 반드시 제주에 도착할 것이다.
배가 출항 준비를 한다.
난 잔잔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때 저 멀리 수평선 끝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잔잔했던 파도는 금세 출렁거리기 시작한다.
빗방울이 세차게 떨어져 배를 공격했다.
승객들은 비를 피해 선실 안으로 모여들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또 생긴단 말인가.
파도의 손길은 더욱 세졌고 배를 조금씩 밀어댔다.
배는 제주로 출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배에서 내려 항구의 대기실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문득 어떤 영화가 생각이 났다.
트루먼쇼.
주인공의 일생이 본인도 모르게 생중계되고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연기자인 세상.
날씨까지 바꿔 주인공이 방송 무대인 도시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세상이 내가 제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를 빼고는 내가 제주로 가는 것을 모른다.
가족에게도 도착하면 말할 생각이었다.
아... 그가 나를 막은 것일까?
아니면 제주가 나에게 저주를 내린 것일까?
안돼. 오지 마.
넌 이곳에서 살 수없어.
난 오열을 하며 무릎을 꿇는다.
천천히 상상에서 빠져나온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제주로 떠나는 날 그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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