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활주로는 제주로

To. 제주에게

낮가림 2022. 3. 5.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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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야.
잘 지내고 있니?
서울은 봄이 옆자리에 앉아서 조금 따뜻해.
사실은 오랜만에 얼굴 보러 가려했었어.
근데 시간이 안나더라.
너무 보고 싶은데 미안해.

요새 입맛이 없어서 네가 내어준 싱싱한 회들이 생각나.
활어 물회에 밥 말아먹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어.
아침 산책 후에 네가 만들어준 고기국수도 얼마나 담백하고 고소했는지.
네가 직접 착즙한 한라봉 에이드도 정말 시원하고 달았어.

여기 서울은 고층 건물로 꽉 막혀있어서 많이 답답해.
네가 직접 키운 농작물로 가득한 시원한 푸른 밭이 보고 싶다.
밭 사이로 난 길에 가만히 서있으면 향긋한 풀내가 코끝으로 몰려들었지.
그 산뜻한 기분이 하루 종일 갔었어.

네가 비밀스레 꾸미던 곶자왈도 또 들어가 보고 싶어.
햇빛이 들지 않는 야생의 숲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몰랐어.
다음에 간다면 꼭 반딧불도 보고 올 거야.
나 커다란 비자나무도 또 보고 싶어.
너에게 숲을 가꾸는 그런 굉장한 재능이 있는지 몰랐어.
숲이 우거지고 돌에서 이끼가 자라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

요새도 바람을 잡으러 다니니.
네가 그렇게 바람을 좋아하는 줄 몰랐어.
숲에서도 불고 물가에서도 불더라.
사실 바람 때문에 너한테 관심이 갔었어.
넌 몰랐을 테지만...
오름 위에 올라가서도 네가 돌아다니는 모습을 지켜봤어.
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하지만 넌 집에 놀러 와 준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었지.
사실 내가 잘 기억나지 않을 거야.
나는 낯도 많이 가리고 부끄러워서 너한테 표현하지 못했어.

다음에 내려가서 보게 되면 너의 이름을 작게 불러주고 싶어.
제주야.
어디 아픈데 없이 건강하니.
혹시 나 기억나?


 


제주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나의 방문에 놀란 걸까?
아니 그럴 리 없다.
나 또한 수많은 여행자 중에 하나일 텐데 기억할리가.
그저 이름을 불러주어서 놀랬으리라.
어색한 긴장감이 흘렀다.
제주는 오름의 억새풀들을 바람으로 솎아주는 중이었다.
멈춰있었지만 제주의 손끝에서 옅은 바람이 불어 머리를 흩트리고 있었다.
동그란 눈 주위에 작은 땀방울들이 맺혔고, 흙먼지가 살짝 앉아있었다.
씨익.
제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미소 지었다.
날 아는 듯하다.

바늘 끝처럼 눈을 찌르던 햇살이 어느샌가 몰려온 구름들에 가려진다.
날이 살짝 흐려지고 제주의 얼굴에 피운 생기가 더 진하게 느껴진다.
제주의 기운에 몰려온 커다란 구름들이 서로 맞부딪히더니
크게 깨지는 소리가 났다.
곧 비가 떨어질 분위기다.
나의 등장이 제주의 감정을 급격하게 건드렸나 보다.
제주는 입술을 스치는 바람에 조용히 말을 얹어 보냈다.
오름과 숲의 짐승들이 바람에 실린 말을 듣고 비를 피하려 숨어들었다.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었고 가지 끝에 매달린 봄 귤들이 종처럼 흔들렸다.
강한 바람이 뒤에서 불어 나를 제주 앞으로 두세 걸음 이동시켜 버렸다.
이제 제주와 나는 가까워졌다.
우리 둘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제주는 맨발이었고 두발이 닿은 자리엔 샛 초록의 풀들이 빗방울을 튕겨내었다.

강한 비바람에 체온이 떨어진 내 손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갑자기 제주는 바람같이 내 손목을 낚아채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내 두발은 제주의 맨발을 쫓아갔다.
우린 신전의 입구처럼 높이 솟아오른 삼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먹구름과 긴가지로 천장이 돼버린 숲은 불 꺼진 방처럼 어두웠다.
빗물에 달라붙은 진한 나무의 향과, 나뭇잎에 바람과 비가 부딪히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때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들렸고 난 제주의 눈을 바라봤다.
그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에서 푸른 파도가 흰 거품을 내며 부서지는 모습이 보였다.
저 멀리 해변가의 먹구름과 바람을 물리고 있는 듯했다.
손목은 아직 제주에게 잡힌 채였고 불에 달군 귤처럼 따뜻했다.
너무 편안해서 그대로 잠이 들 것 같았다.
제주의 눈동자는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었다.
난 스르르 눈을 감았고 제주의 품에 안기었다.
귓속엔 바람소리, 빗소리, 파도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숲에서 듣는 파도소리는 참으로 기묘했다.

난 의식이 끊기기 전에 하고 싶던 말을 작게 내뱉었다.
"보고 싶었어"
잔잔한 바람이 얼굴을 만지며 그 말이 메아리처럼 내 귀에 다시 돌아왔다.
제주가 바람에 실어 보낸 말.
"보고 싶었어"
오름과 숲을 한 바퀴 돌아 이제서야 나에게로 불어왔나 보다.
긴 잠에서 깨어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전히 난 제주의 품에 안겨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