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활주로는 제주로

나는 내가 지난 여름 제주에서 한 일을 알고 있다.

낮가림 2022. 3. 3. 07:00
반응형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지난여름 휴가 때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아마도 집구석에서 조용히 일년 치 낮잠을 즐겼을 것이다.
선풍기를 틀어 놓고 잔잔한 바람에 숨을 섞었겠지.
늦은 오후에 무심히 일어나 아무 계획 없이 습관대로 얼음 가득한 냉커피를 타 마시며 더위 먹은 속을 달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 계획 없이 사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을 지켜주는 룰이었다.
그래야 살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사건 사고도 내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어제가 오늘이고 내일이 또 오늘과 같다.
마치 오늘만 사는 삶이다.
살아온 인생 전체를 쪼개고 쪼개 단 하루로 편집하더라도 오늘 하루와 같다.
편집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 똑같은 하루다.

아무 계획이 없으니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아야 하고 나 자신에게도 피해주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조용히 인생을 숨죽인다.
헛기침도 몰래해야 한다.
눈에 띄는 건 싫다.
방구석 휴가를 보내고 다시 일터로 복귀한다.
지루하다.
항상 똑같은 일.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고 지루하다.
다시 내년 휴가 때까지 똑같은 하루를 만들어 가야 한다.
수량은 365개.
흠없이 똑같아야 한다.
이래 봬도 정말 아무 계획 없이 똑같이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365개 중 불량품은 하나도 없다.
살면서 지금까지는 그랬다.

날씨가 많이 차갑다.
여름이 식고 가을이 왔다가 바로 얼어버렸다.
사계절의 기후가 많이 바뀌었다.
여름 아니면 겨울밖에 없는 듯하다.
나를 둘러싼 바깥 세계는 조금씩 변하고 있지만 내 내면의 세계는 달라진 게 없다.
예상 못한 실수로 조금씩 흠이 날 때가 있지만 습관으로 다시 수정한다.
나조차 알지 못하게 흠은 지워진다.
오늘까지 150개 정도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불량은 없다.
역시나 계획 없이 잘 살고 있다.

어둡다.
꿈이 없는 잠을 자는 중이다.
그렇게 멍하니 아무 꿈도 상영되지 않는 텅 빈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별처럼 적막하다.
자고 있으나 깨어 있을 때랑 아무 차이가 없다.
있다면 누워있느냐 서있느냐 차이다.
아무 꿈도 꾸지 않았고, 아무 꿈도 꿈꾸지 않았다.
갑자기 귓가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것도 없다.
잠 속 말고 밖에서 실제로 비가 내리나 보다.
어두웠던 텅 빈 스크린에 구름이 보인다.
하늘이 이쁘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땅 위에서 쳐다보는 하늘의 구름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구름이다.
앉아있던 의자가 비행기 기내 좌석으로 바뀌어 있다.
어... 꿈인가?
어디로 가는 거지?
구름 밑으로 거대한 제주가 보인다.

어? 저 땅이 제주라는 건 어떻게 알고 있지?
나 제주도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이상하다.
그러나 꿈속에서의 시간이 조금 지나니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꿈속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없고 가보지 않았어도 가본 곳이 된다.
꿈이니까.
그저 정말 오래간만에 꾸어 보는 꿈일 뿐이다.
그래 꿈이니까 맘껏 즐기자.
난 자각몽을 꾸었다.
제주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동문시장으로 갔다.
처음 와보는 곳인데도 꿈속에선 너무나 친근한 장소였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고등어 회를 먹었다.
신기하게도 내 맞은편에 그가 있었다.
제주도에 자주 놀러 갔던 친구가 꿈속에서 나와 함께 웃고 있었다.
제주에서 나를 안내하라고 무의식에서 불러왔나 보다.


높이 솟아 오른 야자수와 곳곳에 상징처럼 자리 잡은 오름들.
제주는 공기 대신 바람으로 가득 채워진 곳 같았다.
게임 속 맵을 탐험 하듯이 난 그와 바람에 몸을 맡겼다.
처음 보는 집에 들어가 꿈속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었다.
여유를 가지고 커피를 마시며 푸른 자연을 응시하였고 너무나 맘이 편했다.
걱정 없는 세상이었다.
참으로 긴 꿈이었고 추운 겨울에 한 여름의 습한 꿈을 꾸고 있었다.

깨었다.
눈이 번쩍 떠졌다.
이런 재밌는 꿈이라니.
난 꿈이 잊히지 않도록 기억의 파편 한 조각까지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시간 순서는 맞지 않았지만 생각나는 모든 기억들을 계속 재생시키고 또 재생시켰다.
꿈속에서 4박 5일을 제주도에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룻밤 새에 많은 시간들을 제주에서 있었다.
이상한 꿈이지만 꿈은 원래 이상하니까.

다시 똑같은 하루가 재생된다.
지난밤 꿈은 꿈일 뿐이다.
묵혀진 습관에 곧 지워질 기억 쪼가리다.
어제 했던 행동을 그대로 복사해서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가장 좋은 효율성이다.
과정과 결과를 정확히 알고 있으니 매일 반복하면 된다.
더 빼고 더할 것도 없다.
모든 것이 루틴화 되어있다.
어... 나도 모르게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있었다.
꿈속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자꾸 생각이 난다.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망설이면 오늘 하루는 불량이 된다.
어제와 겹치지 않는 하루인 것이다.

생각났다.
내가 지난여름 휴가 때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왜 난 집에서 휴가를 보냈다고 알고 있었을까?
내 안의 보호체계가 그 며칠의 기억들을 지우려 했었다.
꿈인 줄 알았던 제주의 기억은 진짜였다.
제주의 기억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나에게 알려주고 싶었나 보다.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고.
나 여기 있다고.
기억하라고.
다시 생각하라고.

난 멍하니 멈춰 있었다.
여전히 아무 계획이 없었다.
그것이 내 인생의 룰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사고가 일어났다.
머릿속은 휴가 이후 생산된 150개의 오늘을 불태우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은 같지가 않다.
오늘은 내일과 같다.
달라졌다.
편집점이 생긴 것이다.

365개의 하루 중 5개가 불량이었다.
그 불량이 오늘을 바꿨다.
오늘은 불량이다.
오늘은 내일과 같고 모두 불량이다.
난 하고 싶은 대로 불량하게 살 것이다.

나는 내가 지난여름 제주에서 한 일을 알고 있다.

'내 활주로는 제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로 가기 위해 과거를 바꾸다.  (2) 2022.03.06
To. 제주에게  (2) 2022.03.05
제주  (2) 2022.03.01
제주에서는 아침을 먹자  (10) 2022.02.25
제주 걱정  (8) 2022.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