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13

제주에서의 기억을 지우자

기억을 지워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제주에서의 과거를. 모두 지워야만 추억하지 않고 지금을 살 수 있다. 난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뒤로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마다 한달이다. 과거를 돌아보며 알게 된 사실은 실제 제주에 있었던 날은 열흘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날들을 반복적으로 추억한 시간들을 합한 날이 훨씬 길었다. 난 걱정과 후회도 아닌 과거의 기쁨을 만끽하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한 것이다. 행복한 추억과 경험이었지만 내가 제주를 향해 나아갈 때마다 힘이드는 날은 과거의 추억을 불러와 대리만족으로 끝내버릴 것이다. 지금의 나에겐 추억은 중요하지 않다. 살아보지 않은 미래 또한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순간 내가 제주에 있다는 현실인식이 필요할 뿐이다. 서울의 탁한 공기가 아니라 바람이 섞여 물처럼 ..

제주를 상상하기

제주가 있다. 방바닥 위에. 난 관찰자가 되어 항공샷 시점으로 제주를 둘러본다. 미니어쳐가 된 가상의 제주. 상상의 영역이 확장되며 제주 주위의 방바닥도 파란 바다로 물들어간다. 서쪽하늘에 손을 올리자 비자림에 거대한 그늘이 진다. 손가락으로 숲을 한번 쓰다듬어 준다. 촉각도 상상으로 느껴본다. 나의 작은 제주는 오늘도 평화롭다. 제주를 상상하면 항상 제일 먼저 생각나는 장소가 있다. 바로 첫 숙소가 있었던 송당리. 첫날 비까지 맞으면서 신나게 돌아다녔고 다음날 제주에서의 첫 아침은 전에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고요함과 왜인지 모르지만 청순한 햇살. 그때 그 장소의 온도와 바람에 묻어온 숲냄새. 작은 새끼고양이와 큰고양이가 뒹구는 초록의 잔디밭. 그 모든 풍경과 감각들이 각인 된..

내가 제주로 가는 건 비밀이다

내가 제주로 가는 건 비밀이다. 친구인 그 외에는 가족이나 주변 지인 그 누구도 모른다. 심지어 제주도 모르고 있다. 조심히 비밀스럽게 마흔이 넘은 어느 날부터 아무도 모르게 일탈을 꿈꾸고 계획 중이다. 사람이 사는 장소와 환경을 바꾼다는 건 거의 모든 걸 바꾸는 거라 생각한다. 지금은 예측할 수 없지만 내가 딱히 애쓰지 않아도 생길 무의식적인 습관도 만들어질 것이고 타지에서 온 이방인이 갖게 되는 방어기제도 생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만큼 제주를 이해하고 편견을 갖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제주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하려 노력 중이다. 또한 왜 제주에 정착했다가 다시 돌아오는지도 자세히 알아보려 한다. 모든 걱정되는 고민거리에 대한 계획을 다 세워놨을 때 정말 어느 날 아무 걱정 없이 짐을 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