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활주로는 제주로

제주 심야괴담회

낮가림 2022. 8. 5.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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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밤





나는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취향이다.
비디오테이프가 메인이었던 그 시절에는 하루에 2편씩, 공포영화 혹은 호러영화라고 불렸던 영상물들을 빌려서 집으로 가져왔다.
가장 밝은 대낮 부모님과 형제들은 모두 사라지고 나 홀로 공포영화를 즐겼다.
사람의 마음을 놀래키기 위해 온갖 기교를 부리는 영상들을 보며 그 시절 나는 꿈을 꾸었다.




작년 나의 여름휴가 미션 중 하나는 숙소에서 TV로 밤늦게 심야괴담회를 본방으로 보는 것이었다.
낮에는 제주의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저녁에는 지친 몸을 정갈하게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심야괴담회를 기다렸지만 제주는 지방방송이 나왔다.
나는 크게 낙담했고 통창으로 보이는 검고 검은 숲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때의 한을 품고 난 올해는 꼭 제주에서 심야괴담회를 보리라 다짐했다.




해가 바뀌어도 제주에서 심야괴담회 본방을 해줄 리 없었다.
하지만 유튜브 채널에는 심야괴담회 이야기 한 편씩을 따로 편집해서 업로드하고 있었다.
마침 이번에 지내게 될 숙소는 7월에 오픈한 신축펜션이었고 TV도 있었지만 LG 빔프로젝터가 거실에 놓여있었다.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처음 느껴보는 빔프로젝터의 매력을 확인했다.
낮에는 확실히 시청하기가 힘들었지만 해가 고개를 숙이자 어두운 밤은 최적의 공간을 만들어줬다.
유튜브에서 심야괴담회를 검색했고 도시와 동떨어진 곳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재생했다.
잠시 후 눈치챈 친구는 무섭다며 복층으로 올라갔다.
어두운 밤 작은 마을과 동떨어진 한 펜션에서 심야괴담회가 하얀 벽 위에 상영되고 있었다.




보고 나니 천장 위에서 새어 나오는 시스템 에어컨의 냉기가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흔들리는 귤나무도 누군가 가지를 잡고 흔들고 있다는 상상도 들었다.
자연스레 나는 공포의 밤을 내 온몸에 최적화시켰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들면 내가 초대한 공포가 나의 꿈속으로 들어올 것 같았다.
소파 위에 누워 쿠션을 들어서 배와 다리를 덮었다.
조용히 빔프로젝터의 전원을 끄고 나 또한 눈꺼풀의 셔터를 내렸다.
내가 보는 물리적 세상은 흑막이 쳐졌고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조용히 잠이 다가와 수면가스를 뿌렸고 흑막도 사라졌다.

나는 제주에서 꿈을 하나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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