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적힌 나의 DNA
하얀 A4 종이 위에 내 인생의 모든 단서들을 적어나가고 있다.
나라는 존재가 현재라는 이야기 속에 들어온 배역처럼 연기하며 앞으로 어떻게 이 이야기를 재밌게 이끌어가야 할 것인지 궁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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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어떤 경제적 생활을 할 것인지, 지금 현재 무엇을 배울 것인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스스로 궁금해하지 않았던 물음들에 대해서 사무실 한편에 앉아 조용히 답하고 있다.
그 모든 물음들에 답하고 정리가 되는 순간 더 이상은 그것들에 대해 간헐적으로 고민하고 떠보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의 모든 몸과 털에는 나선형의 DNA가 존재하고, 그 DNA에는 그 사람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
나는 내가 그려갈 인생의 모든 정의를 작은 종이 한 장에 압축해서 나타내려 한다.
누군가 이 종이 한 장만 보아도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DNA로 만들려 한다.
그렇다고 이 종이에 적힌 내용이 나를 가두는 고정관념은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조금씩 환경에 바뀌어 가는 것처럼 기본값을 바탕으로 업데이트하려 한다.
내가 서울의 환경을 고정값으로 살아오다가 제주라는 환경을 체험한 후 고정값이 변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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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참으로 재밌는 놀이다.
흥미진진하고 긴장감이 넘친다.
나를 살피며 관찰하는 행위이고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구나 하는 한 편의 허망한 드라마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미래를 껴넣으니 일상의 습관과 삶의 각본이 조금씩 수정되어 간다.
나는 이야기를 참으로 좋아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 그 캐릭터에 동화되어서 같은 패턴과 마음가짐으로 현실을 살아간다.
첩보영화나 스파이물을 보고 나온 날은 지하철의 CCTV를 의식하며 걷고 군중 사이로 살며시 껴들어간다.
내가 가장 최근 본 영화는 '헤어질 결심'이다.
배우 박해일이 맡은 형사 배역 해준이 쌍안경으로 서래를 자세히 관찰하고, 그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녹음으로 기록하듯 나 또한 나를 자세히 관찰 중이다.
영화의 지배감이 존재하는 동안은 해준이라는 캐릭터의 에너지를 이용해서 최대한 나를 파고 싶다.
누군가 내 삶을 관찰한다면 얼마나 재미가 없는 삶일까?
아무리 재밌는 이야기와 매력적인 배우가 나오는 영화라도 매일 보라고 한다면 정말 지루할 것이다.
하물며 어떤 이가 누군가에게 큰돈을 줄 테니 내 일상을 관찰하고 기록하라고 한다면 과연 오래갈 수 있을까?
일관되지 않고 지루하지 않은 예측할 수 없는 삶.
그렇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그런 인생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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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과 생각을 종이에 적어나가는 이 작은 움직임이 얼마나 큰 먹구름과 비바람을 불러올지 이때는 미쳐 알지 못했다라고 미리 인생의 복선을 달아본다.
참고로 나는 먹구름과 미칠듯한 비바람, 천둥, 번개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광기가 세상을 뒤흔든 후에야 우리는 햇살 아래 고요를 알아채기 때문이다.
일기예보가 잘 맞지 않아 예측할 수 없는 제주의 날씨처럼 내 인생 제주같이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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