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숙박자와 아침의 감각
![](https://blog.kakaocdn.net/dn/bChNCO/btrJmwuWS5f/ICwRVpRNwy5kb2w4R7Gf60/img.jpg)
보통의 기상보다 조금은 늦게 두 눈에 햇살을 맞이한 시간.
나는 기분 좋은 여유를 느끼며 데크에 마련된 작은 캠핑 탁자에 분다버그 한 병과 제주에서 읽기 위해 준비한 책 한 권을 내려놓았다.
가벼운 바람을 느끼며 캠핑의자에 몸을 맡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조금은 덥고 습한 기운이 가득한 공기 중에 라임향이 올라와 섞이며 바람이 불 때마다 내 코의 감각기관을 두드렸다.
양말도 신지 않은 누드의 발을 가볍게 편채로 몸의 모든 힘을 빼고 지금 이 순간 오감이 느끼는 제주의 모든 감각을 받아들였다.
아 계속 상상해 오던 제주의 아침이었다.
![](https://blog.kakaocdn.net/dn/QhBzO/btrJlVPzlHE/W9SUQu4KofNh2PGuSrSDH1/img.jpg)
눈을 감고 있어도 햇살이 전해주는 따뜻함이 붉게 느껴졌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시각을 개방했다.
손을 내밀어 분다버그 음료병의 차가운 냉기와 초록병 겉 표면에 맺힌 땀을 한꺼번에 움켜쥐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병 입구는 내 입술에 닿았고, 정확한 기울기로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내 혀의 미세 감각 위로 슬라이딩하며 시큼 상큼한 미각을 전달했다.
분다버그 레몬라임 맛은 기억 속에 풍부한 레몬의 향을 불러왔고, 눈앞에 가득한 청귤 밭을 지워버렸다.
바람이 불어 귤나무의 잎과 청귤을 종처럼 흔들었을 때 잠깐의 최면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당신도 초자연적이 될 수 있다'책을 들어 페이지를 넘겼다.
천천히 한 문장씩 음미하며 읽어 내려갔고, 지금 이 순간 나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단순함이 아침의 순간을 온전히 살게 했다.
출퇴근을 반복하는 서울에서는 절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아침의 시간이었다.
서울에서는 분초를 다투던 대중교통의 승하차 시간이 오감을 죽이고 있었다.
제주의 이른 아침은 나의 오감을 일깨워냈다.
나는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으며 미래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지금 눈앞의 풍경과 사물들에만 내 주의를 집중하고 있었다.
감각이 너무 선명해서 주변을 감도는 공기마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https://blog.kakaocdn.net/dn/nESRt/btrJlVvfpzZ/mFk4UMhOkt1MJp9WpokMz0/img.jpg)
청귤 밭에서 장기 숙박 중인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흙바닥에서 뒹굴며 누구보다 제주의 땅과 친밀하게 오감을 나눠왔을 생명체를 보며 나는 읊조렸다.
"귀여워..."
초록의 제주와 청귤보다 먼저 익어버린 감귤색의 고양이가 나의 시각을 풍부하게 채워버렸다.
고양이는 잠시 뒤 귤나무 밑으로 숨어버렸고 긴 꼬리만 미끼처럼 남겨 놓았다.
꼬리 미끼에 잠깐 한눈 판 사이 하늘의 해는 조금 더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분다버그 초록병은 습하다는 듯이 병 밖으로 큼직한 땀을 몇 방울 흘리고 있었다.
나는 펼쳐진 책을 해가 엿보지 못하게 덮어버렸다.
나의 제주의 아침은 은밀해야 했다.
장기숙박자 고양이에게 들켰으나 우리는 서로
의 아침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둘 다 은밀하고 사적인 취향을 가진 존재들이니까.
![](https://blog.kakaocdn.net/dn/GtwT9/btrJmxHRmcq/qCe4yKbNlplNselNQ10km0/img.jpg)
나는 꿉꿉한 감각에 못 이겨 책과 병을 들어 자리를 비웠다.
숙소의 문을 살짝 열어보니 틈 사이로 에어컨 바람의 시원한 냉기가 새어 나왔다.
왜 고양이가 나무 그늘 밑으로 숨어들어갔는지 이해했다.
천천히 문을 열고 나도 그늘 밑으로 들어갔다.
제주의 아침은 나에게 또 다른 감각을 남겼다.
고양이와 나만 아는.
'내 활주로는 제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의 삶을 위해 돈에 대해 생각하기 (5) | 2022.08.12 |
---|---|
서울에서 발행하는 제주 뉴스레터 (9) | 2022.08.11 |
제주나 서울이나 자연재해는 조심하자 (4) | 2022.08.09 |
제주 가기 전에 무게를 줄이자 (8) | 2022.08.08 |
제주아닌 꿈 (6) | 2022.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