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여름. 두 번째 제주도 여행을 준비했다.
웹서핑으로 제주도 관련 여행자료를 찾아봤고 그중에 눈길을 끈 건 아이유가 등장하는 제주 삼다수 영상이었다.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아이유가 햇빛이 길게 떨어지는 울창한 삼림 사이로 제주 삼다수 생수병을 높이 들어 보다가 시원하게 물을 마시는 CF였다.
계속 돌려보던 나는 배경이 된 장소에 마음이 움직였다.
제주 삼다수 공장이 있는 삼다수 숲길.
그래서 여름 휴가 첫 장소로 삼다수 숲길을 정했다.
그래. 아이유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이다.
제주공항에 내린 우리는 곧바로 택시를 잡아 동문시장에 들러 회를 먹은 후에 다시 택시를 잡고 제주가 좋아서 숙소로 들어왔다.
코로나 시국이라 늦은 체크인 시간을 지켜야 했고 현관 로비 앞에 캐리어와 짐들을 세워서 맡긴 채 첫 여행지로 떠나야 했다.
숙소 앞이 바로 버스 정류장이어서 오랜 기다림없이 버스를 타고 출발을 했다.
정말 딱 1년만에 다시 보는 제주의 집들과 풍경들.
1년 전 여행의 출발은 단순히 가벼운 호기심이었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는 헤아리기 힘든 무거운 의문을 가지고 돌아왔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제주도 여행은 내 확신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버스가 내려준 곳은 아직은 계발이 되지 않은 느낌의 장소였다.
그와 나는 급하지 않다는 듯 천천히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좁은 길이 나오고 삼다수 숲 입구로 향하는 길이 나왔다.
길 주변에는 이쁜 집들이 여기저기 띄엄띄엄 지어져 있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낮에 보면 아기자기하고 이쁜 집이지만 어두워지면 주변이 커다란 나무들과 숲이라 돌아다닐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사는 사람들은 감수하고 사는 것이겠지.
조금 더 들어가니 삼다수 수원지라는 안내판이 보였고 삼다수 숲길로 들어서려는 방문객들이 보였다.
우리 외에는 대부분 차를 타고 다른 길로 들어온 것 같았다.
그렇게 사람들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니 드디어 삼다수 숲길 입구가 나왔다.
입구에 줄줄이 세워진 커다란 나무의 무리들은 웅장함 그 자체였다.
숲길 입구에 깔린 붉은 화산송이.
아이유와 영상에 함께 등장한 붉은 돌이었다.
강한 자연의 향이 숲에 가득했다.
커다란 나무가 주는 위압감과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이 만나면 저절로 경배감이 들었다.
나무들은 정말 빼곡히 자라있었고 삼다수 영상에서 봤던 아이유가 나무들 사이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아이유의 흔적들이 느껴지는 숲의 분위기였다.
그도 알고 있었다. 아이유가 다녀간 곳들을 포인트로 잡아서 온 여행이라는 걸.
삼다수 숲길 외에도 KBS 다큐에 소개됐던 청수 곶자왈도 다녀갈 예정이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여행의 동기는 아이유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이었지만, 나에겐 이런 대자연으로 가득한 제주에서 오래오래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내적 동기가 더 강했다.
이 때는 그도 내가 여기 살려고 방문했다는 걸 몰랐을 때였다.
숲은 내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식물들로 가득했다.
확실히 육지의 산속에서 보았던 식물군들과 느낌이 달랐다.
거대한 나무들로 둘러싼 공간들은 이국적인 느낌과 한낮인데도 으스스한 느낌이 살갗에 전해졌다.
검게 죽어버린 나무가 보였다.
쓰러진 그는 사선으로 다른 이들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고 그 모습은 숲의 검은 사신 같았다.
예상보다 삼다수 숲은 그 규모가 꽤 컸고, 단순히 숲길이 아닌 오르막과 내리막이 자주 반복되는 거친 등산로였다.
온통 그린으로 뒤덮인 숲의 식물들을 난 사진으로 남겼고 자그마한 소리로 말을 걸었다.
"내가... 여기서 살 수 있나요?"
위험한 행동이었다. 난 주문에 걸린 것처럼 비틀거리며 한 발 한 발 내디뎠고, 내심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 내 귀에 찢어져라 대답해주길 원했다.
여기서 살 수 있다고. 삼다수 숲을 지키는 가장 오래되고 지혜로운 존재가 너를 축복한다고.
유니콘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숲의 분위기 속에서 난 나무요정과 삼다수 물의 정령을 떠올리며 걸었다.
이것은 하나의 여정이었다.
숲의 시험. 나에게 불었던 도로 위의 그 바람도, 친구와 나를 홀렸던 그 야자나무도 모두 자연이었고 내가 제주에 살게 된다면 그건 온전히 자연이었다.
오래전 영상 속 아이유는 길 안내자가 되어 우릴 삼다수 숲길로 인도했다.
아이유가 아니었다면 우린 다른 장소를 택했을 수도 있다.
운명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길 안내자를 보내고 따르라 한다.
우린 따랐고 그녀의 흔적을 떠올리며 숲을 걷는다.
숲은 아직 대답이 없다.
이 숲을 걷는 이들 중에 나와 같은 질문을 건넨 이 가 또 있을까?
아님 여정이 끝난 후에 꿈속에 나타나 메시지를 줄 것인가.
숲의 출구에 가까워오자 굵고 커다란 나무들이 다시 줄을 서있었다.
지친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삼다수 물병의 물을 목 구녕으로 털어버리고 방문객들을 위한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땀으로 젖은 우리의 피부는 바로 반응했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
출구에서 포장된 길을 찾아가는 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숲 안내 표지판이 복잡하게 꼬여있어서 정확한 출구를 찾는데 조바심이 들 정도였다.
이제 숲의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어서 빨리 숲을 빠져나가 숙소로 돌아가서 배를 채우고 싶었다.
드디어 인간의 손길로 포장된 길이 나왔다.
끝이 난 것이다. 숲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내가 듣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질문은 내가 했는데 대답은 다른 여행자가 들었을 수도 있다.
내려오는 길가엔 작은 공장이 보였는데 삼다수공장이었다.
공장도 이런 곳에 있으니 굉장히 아늑해 보였다.
조금 더 내려가니 작은 가정집이 있었다.
따가운 햇빛을 손으로 가리고 걷던 나는 웃음소리에 살짝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한낮의 찬란한 햇빛 속에서 아이들과 물놀이를 하고 있는 부모들의 모습이 천천히 느리게 보였고 마치 그 장면만 정지된 사진처럼 남겨졌다.
숲 주변의 행복한 가정. 입구에서 보지 못했던 주민들의 모습이었다.
잠깐의 부러운 시선을 햇빛 한줄기가 막아섰고, 난 고개를 돌려 다시 길에 시선을 던져야 했다.
아... 생각났다. 이것이 숲의 대답인가?
들려준 것이 아니라 보여준 것인가?
의문을 가진채 우린 숙소로 돌아왔다.
아이유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숲 안내자가 되어 누군가를 인도했음을.
삶의 해답을 얻기 위해 어느 날 누군가가 삼다수 숲길로 향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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