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가 모여서 섞이며 만들어 내는 질서에 따를 일이 아무것도 없다.
태풍 힌남노가 온다고 하더니 선선했던 날씨가 다시 더워졌다.
날은 따분하고 어제와 같은 시간표를 살며 내일은 다를 거라고 기대를 한다.
문득 학교를 다니던 소년 시절에 방학만 되면 생활시간표를 만들어서 담임선생님에게 제출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동그란 원안에 24시간의 정해진 일과를 빽빽이 채웠었다.
잠과 공부, 놀이, 휴식, 식사시간 등을 섞어서 나열했고 나름 열심히 시간표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시절 시간표대로 잠에서 깨어나고 운동을 하며 공부와 놀이를 하였던 친구들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지금이야 집에 컴퓨터와 휴대폰 등 혼자서 즐길거리가 많아 외출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 시절에는 노는 것도 모두 모여서 놀았다.
숨바꼭질을 하거나 술래잡기, 구슬치기, 얼음 땡등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모든 아이들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동그란 원안에 칸을 나누고 여러 가지 색깔로 채워 넣었다.
마치 나는 이번 방학에는 꼭 이렇게 살 거야 하는 다짐을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보여주듯이.
공부도 과목별로 나누어서 시간표를 채워 넣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표는 지켜질 수가 없었다.
각자의 노는 시간은 다 달랐지만 분명 아이들은 모두 같은 시간에 모여서 놀았다.
같은 시간에 서로의 집에서 모여 방학숙제를 하거나 밥을 먹었다.
서로 다른 시간 개념의 아이들이 모였지만 분명 하나의 질서를 이루어 함께 놀고먹고 공부하고 잠에 들었다.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하며 사는 나의 시간표는 새벽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하고 오후 5시까지 직장에서 에너지를 쏟는 것이다.
퇴근 후 집에서 식사를 하고 사적인 시간들을 갖는다.
너무나도 지루하고 똑같은 시간표에 질린 나는 항상 미래를 상상한다.
소년 시절 그랬듯이 미래의 시간표를 상상한다.
제주의 아침에 일찍 일어나 씻고 명상의 시간을 가진다.
간단한 식사를 한 후에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한다.
남은 시간에는 책을 읽고 내가 일하고 싶은 시간에 일을 하고 휴식을 취한다.
방학시간표와 크게 다른 것은 없다.
그 시절 공부가 일로 바뀐 것 외에는 다 비슷비슷하다.
어른이 되고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도 나는 내가 정한 시간표를 따를 수 있을까?
프리랜서가 되면 혼자 일을 하게 되고 아무도 터치하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 친구가 적어지거나 없다.
놀아도 혼자 놀게 된다.
무리가 모여서 섞이며 만들어 내는 질서에 따를 일이 아무것도 없다.
밥도 혼자 먹게 된다.
비로소 학교와 회사를 벗어나 독자적인 우주가 된다.
진짜 나의 개성으로 인생을 채울 수 있고 칸칸이 나눈 시간표는 먹기 좋고 보기 좋은 케이크처럼 아름다워 보인다.
나는 내 인생을 달콤하게 만들어가야 한다.
태풍이 와도 견뎌내야 한다.
나는 태풍 위의 우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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