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활주로는 제주로

제주에서

낮가림 2022. 2. 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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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알람 소리가 귀를 통해 들어온다.
살짝 눈을 뜸과 동시에 손을 뻗어 시계의 알람을 끈다.
아직 바깥은 살짝 어둡다.
해가 떠서 밝아지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내가 아끼는 촛대 모양의 조명을 켜고 어질러진 이불을 간단히 개어서 침대 위에 올려놓는다.
제주에 내려와서 매일 거르지 않고 행하는 새벽의 의식이다.
집 담장 주변을 바람이 떠나지 않고 계속 창가를 향해서 휘파람을 분다.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걸 아나보다.
매번 동네를 지날 때마다 고양이가 집 앞에서 소리를 내듯이 머물다가 떠난다.
기분 좋은 바람소리가 사라지면 감상을 끝내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간다.
발끝으로 무게를 옮길 때마다 중력이 아래로 이동한다.
차가운 나무계단의 온도가 아직 덜 깨어있는 나의 의식에 찬물을 붓는다.
1층의 공기는 살짝 서늘하다. 겨울이 입김을 불고 갔나 보다.
주방 싱크대 위에 올려진 커피포트에 삼다수를 붓는다.
이제 곧 마법처럼 커피포트 안의 삼다수는 서늘한 주방과 거실의 공기 중으로 떠올라 희미한 구름을 만들 것이다.
버튼을 누르자 삼다수가 끓는 소리가 들린다.
얼른 뒤집어놓은 컵을 바로 세우고 곶자왈커피 드립백 포장을 뜯는다.
입구의 점선을 따라 뜯어내자 커피 원두 가루의 진한 향이 콧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컵 입구에 드립백을 걸치고 뜨거워진 삼다수를 붓는다.
삼다수가 커피 원두 가루와 만나자 작은 거품이 입구까지 차오르고 다시 중력에 이끌려 밑으로 가라앉는다.
기분 좋은 향기와 커피의 입김이 내 주변을 감싼다.
작은 따뜻함이 투명이불을 덮은 것처럼 훈훈하다.

입술로 바람을 불어  커피를 식힌다.
제주도의 바람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바람은 나에게서 부는 것이다.
바람의 힘이 커피의 수면 위에 물결을 만들고 작은 파도를 치게 만든다.
커피가 흔들리자 빠르게 식어간다.
컵을 살짝 기울여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켠다.
살짝 뜨거운 온도와 청귤 같은 산미가 혀를 만족시킨다.
무엇이든 적당한 온도여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이 담장 밖에서 애타게 불었던 건 집의 온도를 식히려고 그랬나 보다.
적당한 서늘함이 잠을 깨우고 따뜻한 차나 커피를 찾게 한다.
움직임이 몸 전체의 열을 올리고 고요한 새벽을 누리는 정신을 갖게 한다.
눈을 크게 뜨고 의자에 앉아 주방과 거실을 둘러본다.
주방 쪽 문은 투명한 통유리여서 어둠이 필터를 거르지 않은 채 그대로 노출되어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오렌지색 귤빛이 나는 해가 비칠 것이고 지금의 어둠은 달빛에 익어가는 짙은 초록의 청귤과 같은 것이다.
다시 시선을 돌려 내가 앉아 있는 공간에만 집중한다.
커피포트와 컵들 식기도구, 모바일 아일랜드 촛대 조명, 작은 스피커와 미니오븐.
살림살이는 많지 않다.
서울에서 제주로 내려올 때 백팩 하나에 꼭 필요한 짐만 담아왔다.
작은 살림살이들은 제주에서 구매를 했고 나머지 가구나 침대는 집을 연세 계약할 때 이미 있던 것들이다.
일부러 적은 것들로 소박하게 살기 위해 많은 물건을 들여놓지는 않았다.
집안의 비움은 적당해야 사람의 온기로 채울 수 있다.

창문을 비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집으로 들어오고 싶다는 듯 계속 두드리고 창유리에 빗방울이 사선으로 흘러간다.
아마도 바람이 다시 돌아와서 비를 밀어주고 있나 보다.
오늘 비가 온다고 했던가?
제주에서 전날의 일기예보는 큰 미련을 갖지 않아도 된다.
비는 언제고 갑자기 내린다.
알람처럼 정해진 때에 오지 않는 것이다.
마당에 자리한 청귤 나무와 야자수가 비를 맞아가며 천천히 흔들린다.
커피포트에서 올라온 삼다수 구름에서도 작은 비가 내리는지 주방 통유리 앞뒤로 물방울이 맺히고 습기가 찬다.
제주에선 밖과 안 모두 비가 내린다.
서큘레이터 고개를 치켜세워준다.
그래야 녀석두 자기 일에 자긍심을 가질 테니.
밖의 바람보다 약한 바람이 천장을 향해 불고 적당한 시원함이 온몸의 기분을 좋게 한다.
제주의 비 오는 날은 내가 좋아하는 날씨다.
어제 테이블에서 읽다만 책이 삼각 텐트를 치고 있다.
엎드려진 책을 바로 뉘우고서 끓어진 부분을 찾아 읽는다.
커피를 한 모금 다시 들이켜고 책에 집중한다.
아마도 오늘 아침은 해가 뜨지 않을 것 같다.

작은 알람 소리가 귀를 통해 들어온다.
살짝 현실로 돌아오는 동시에 손가락을 올려 글 저장 버튼을 누른다.
지금 서울의 바깥은 많이 어둡다.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
제주에서의 내 삶을 시각화해서 잠깐 살아보았다.
미래를 살아 본다는 건 거꾸로 되돌려 그렇게 되기까지의 현재로 돌아오는 것이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다.
적당한 설렘에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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