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크리스마스이브 날 아침 그는 갑자기 제주도로 떠났다.
김포에서 제주까지 왕복 항공권이 이브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저렴한 가격으로 나온 것이다.
나는 일을 하는 중에 카톡으로 연락을 받은 것이라 그가 너무 부러웠다.
아무 계획이나 예고도 없이 가고 싶을 때 떠나는 그의 즉흥성이 나에게는 큰 배움이었다.
난 그런 실행력이 없다.
여러 가지를 따지고 재봐야 하는 인생이었다.
코로나 이후 제주 항공권은 성수기 비성수기 구분할 것 없이 가격이 올라버렸다.
저렴한 가격의 항공권이 올라오면 언제나 그는 떠났다.
당일이든 몇 박이든 미리 정해두지 않았다.
숙소도 그 날 가서 잡는 식이었다.
자유로운 제주 여행가인 그는 제주의 관광지로 유명한 대부분의 지역을 둘러봤다.
그는 나에게 질투의 대상이었다.
매번 그가 보내는 동문시장의 고등어회 사진은 나에게 고문이었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비난이 이어진다.
물론 직장에 붙들린 그 시간은 현재의 삶을 책임져 주는 월급과 맞바꾼 것이다.
내가 이 월급을 포기할 수 있다면 당장 제주로 떠나 가보지 못한 지역을 찾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난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그때가 될 때까지 지금 이렇게 천천히 준비하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다녀온 그가 나를 위해 선물을 사 왔다.
제주 흑돼지라면, 딱새우라면 이었다.
훨씬 전에 그는 제주의 동문시장에서 흑돼지 컵라면을 구매했고 숙소에서 먹어봤다고 했다.
생각보다 맛있었고 국물이 훌륭했다고 나에게 말했었다.
나도 제주에 가면 꼭 먹어봐야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동문시장에 들렀으나 당시에 짐도 들고 있었고 굳이 여기서 구매 안 해도 숙소 근처의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냥 지나쳤다.
실수였다. 제주 흑돼지라면은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판매하지 않았다.
결국 난 제주의 펜션에서 흑돼지 컵라면을 혀로 느끼고 초록의 자연을 눈으로 먹으려던 작은 소망을 접어야 했다.
제주의 수많은 먹거리 중에서 컵라면 먹는 것이 소망이었다니 남이 보면 이해 안 되는 상황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제주라는 지역명이 붙은 제품이나 먹거리에 강한 긍정과 호기심을 느낀다.
요새는 제주에서 시킨 택배 송장에 제주 주소만 봐도 신기하고 흐뭇하더라.
송장의 내용이 반대로 바뀌어서 보낸 이의 주소지가 서울이고 받는 이인 내 주소지가 제주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가 사 온 제주 흑돼지라면은 아쉽게도 봉지라면이었다.
시간에 쫓기듯 제주 공항으로 달려가야 했던 그는 나를 위해 당장 눈에 보이는 대로 사 왔다.
안양에 살고 있던 그는 빨리 만나서 받아가라며 연락했다.
하지만 연말이었던 그 시기에 직장은 매우 바쁜 때라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난 제주를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시간을 내어줄 수 없는 내 시간이 없는 사람이었다.
늦게 끝나더라도 코로나 영업시간 때문에 진득하게 앉아서 술 한잔 하며 제주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난 계속 약속을 미뤄야 했고 그는 빨리 안 만나면 자기가 먹어버린다고 으름장을 놨다.
한 달 이상이 지난 후에 난 겨우 빠른 퇴근을 했고 그를 횟집으로 불러 만남을 가졌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봉지에 제주 흑돼지라면, 딱새우라면이 2 봉지 들어있었다.
이제야 진짜 주인을 찾았다는 듯 그는 안심해했고 나도 내심 마음속으로 들떠있었다.
이틀 정도가 지나서 퇴근 후에 저녁식사로 제주라면을 끓여먹기로 했다.
냄비에 물을 담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았다.
불꽃이 피어올랐고 물은 제주라면을 맛보고자 하는 내 열망처럼 끓어올랐다.
딱딱한 면을 풀기 위해 뜨거운 물속으로 퐁당하고 떨어뜨렸다.
면과 끓는 물이 만나자 나는 더 조급해졌다.
곧바로 스프 봉지를 들었고 뜯기 전에 봉지에 적힌 자그마한 문구를 읽어보았다.
제조공장이 안양시... 어?.. 어?
순간 생각은 정지됐고 제주라면인데 왜 안양이 적혀있는지 다시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제주도에 라면공장이 있다는 것도 이상했다.
삼다수 공장, 제주맥주 공장, 귤 농장... 등이 있으니 당연히 제주라는 이름이 붙어있어서 제주도 생산인 줄 알았는데.
난 그에게 수프에 적힌 문구를 찍어서 보내줬다.
그도 사진을 보고 한동안 멈춰있었다.
그가 사는 안양이다. 살고 있는 동네 근처에서 제조한 것이다.
그도 힘들게 제주에서 나를 위해 사 왔건만 놀란듯했다.
오랜 시간 동안 기대감에 들뜨게 만든 제주라면이 제주에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허무함이 몰려왔다.
그러나 끓였으니 맛은 봐야지.
난 그와 톡을 나누며 첫 면발을 흡입했다.
감자전분으로 만들었다고 한 것 같은데 확실히 면발이 탱글탱글했다.
국물도 꽤나 시원했고 입안에 계속 맴도는 맛이었다.
컵라면이 더 맛있다고 했는데 그 맛도 궁금했다.
어쨌든 맛있는 라면이었다.
안양이라는 것에 잠깐 실망했지만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보니 동질감이 들었다.
나도 제주에 대한 열망으로 매일 제주에 대한 글을 쓰고 제주 로컬 브랜드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가.
어디서? 서울에서.
내가 만든 것을 보고 사람들도 그러지 않을까?
제주 브랜드라고 생각했는데 서울이라고?
난 스프봉지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꼭 제주가 아니더라도 제주스러운 제품이라고 브랜딩을 할 수 있다는 걸.
어쨌든 재료는 흑돼지와 딱새우가 들어가니까.
그리고 제주가 아니더라도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구매가 가능하다는 걸.
작은 에피소드 이후에도 아직 내 소망은 유효하다.
제주의 펜션에서 초록의 자연풍경을 바라보며 제주 흑돼지 컵라면을 먹어보는 것.
어디에서 만들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먹고 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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