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활주로는 제주로

시뮬레이션 우주와 버그

낮가림 2022. 12. 23.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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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먹은 과일이 더 달고 맛난다.






시뮬레이션 (Simulation)


많은 과학자와 유명인들이 현재의 생생한 삶을 가상의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거대한 우주자체가 하나의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한다.
나는 처음 이러한 시뮬레이션 우주론에 대한 가설들을 들었을 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많은 영화와 드라마들이 비슷한 이야기들을 해왔으니까.

심지어 영화 '트루먼 쇼'처럼 사람이 사람을 인공도시에 가둬놓고 성장하는 과정을 관찰하기도 한다.
주인공 트루먼은 우연한 사건으로 자신이 살고 있던 완벽한 세상의 거짓을 알게 되고 탈출한다.
트루먼의 깨달음과 다르게 이름 모를 관찰자가 가둬놓지 않았음에도 나는 정해진 삶의 선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음에도 그들의 시선을 벽으로 의식한 채 담장 너머를 뛰어오르지 못하는 삶이었다.

시뮬레이션 우주의 시뮬레이션 지구에 살고 있다고 가정한 나는 어느 날 보통의 하루를 가상으로 체험해 봤다.




스마트폰 알람 앱이 울리고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화장실로 들어가 양치질을 하고 면도기로 밤새 자란 잔디를 깎아낸다.
비누거품을 내어 얼굴을 구석구석 씻고 묵은 각질을 밀어낸다.
샤워기로 머리를 적시고 샴푸를 손에 덜어낸다.
머리카락의 기름때가 빠지도록 거품을 내고 따뜻한 온수에 깨끗이 헹구어낸다.
수건으로 온몸을 닦아내고 서큘레이터를 최대풍속으로 올려서 인공바람으로 머리를 말린다.
바닥이 온돌이어도 젖은 몸과 머리에 찬바람을 맞으니 피부가 살짝 떨린다.

옷을 갈아입고 무선이어폰을 챙겨서 가방에 넣는다.
어제 쓴 마스크를 스트랩 고리에서 빼고 휴지통에 접어 버린 후 새 마스크를 연결한다.
집에서 나가기 전 부엌의 가스레인지 다이얼이 잠겨있는지 일일이 손으로 만져 확인하고 가스밸브를 확인한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어 빌라 건물 안에 가득 찬 차가운 공기를 맞이한다.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고 약간 얼은 빙판 길을 조심히 걸어간다.



나는 방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베개 위에 얼굴을 포개고 눈을 감아 정확히 상상했다.
모든 오감을 끌어모아 1000번 이 넘게 되풀이된 평범한 출근시간을 제자리에서 체험했다.
씻는 물의 온도와 촉감, 차가운 바람, 찬 공기, 옷을 갈아입을 때 일어나는 피부와의 마찰 등 모든 것을 현실과 그대로 시뮬레이션했다.
사실상 시뮬레이션이란 어떠한 현상이나 사건을 데이터나 수치로 프로그램에 입력하고 진행하여 결과를 예측해 보는 작업이다.
나는 이미 끝을 알고 있는 과정을 뇌에서 다시 재생시켜 본 것이다.




현관문을 나온 후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는 길에 일어나는 작은 간섭들을 모두 겪어봤다.
그리고 귀에 무선 이어폰을 끼운 후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영상을 재생했다.
지하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조금은 따뜻한 공기가 얼굴을 덮었다.
지하철에 탑승한 후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상상을 멈추었다.
몸에 베인 습관들을 머리로 재생시켜보니 참을 수 없이 지루했다.
오감을 동원한 체험이었고 최대한 시간을 단축해서 상상했다.
하지만 내가 평소 출근준비를 하던 시간의 분량과 많은 차이가 나지 않았다.

1000번이 넘게 해 온 과정과 행동들을 머리로만 체험해보니 단조롭고 임팩트가 없었다.
출근한 후에는 이보다 더 지루한 하루가 펼쳐진다.
나는 무엇을 위해 출근을 하는 걸까?
직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반복된 삶의 모형이 원인이었다.
사실 반복은 게임 안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행동이다.
실패한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 위해 똑같은 행동을 반복적으로 취하며 조금씩 속도나 방향을 달리한다.
그 조금의 다름이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가게 한다.
나 역시 블로그에 글을 적으며 조금씩 다름을 시도해보고 있다.
다행히 재미를 느끼며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버그 (Bug)


예전의 나는 반복된 삶의 모형을 아무런 수정 없이 그대로 살아왔다.
내가 중학생 시절 당시 게임의 메카였던 용산으로 간 적이 있다.
어떤 건물에 들어가면 게임 CD를 불법으로 복제해서 만들어주었고, CD 한 장에 대략 20개 이상의 게임이 들어있었다.
나는 신나서 집으로 돌아왔고 그 게임들을 실행해 봤다.
대부분 재미가 있었고 어떤 게임은 1년이 넘도록 플레이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 게임모음집 CD는 머리만 있고 몸통과 꼬리가 잘려있었다.
수록된 모든 게임이 데모게임이었던 것이다.

몇 번만 플레이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거나 똑같은 스테이지 안에서만 행동할 수 있었다.
시작은 있으나 결말은 없는 이야기를 나는 죽어라 플레이하고 있었다.
예전 내 삶이 그때의 데모게임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다른 길로 들어서고 노력해봐도 결국은 데모게임인 것이다.
새로운 아이템도 더 진행할 미션과 목표가 없는 게임.
지금의 나는 새로운 스테이지를 미리 정해놓았다.
그것이 바로 제주.




다음 스테이지가 정해졌기에 더 이상 내 삶은 데모버전이 아니다.
이 삶이 시뮬레이션이라면 버그를 일으켜보는 것도 재미가 아닐까?
인생에 닥쳐오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다.
돈 문제, 인간관계, 건강, 사랑 등 수없이 많은 걱정들이 삶을 건드린다.
반대로 내 존재자체가 그 모든 걱정들을 압도하는 걱정이 되어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일상을 위협하는 버그들에 맞서서 스스로가 슈퍼버그가 되는 것이다.
마치 오크들을 때려잡는 사우론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버그(Bug)에 관련해 나무위키 글을 읽어 보던 중 재미있는 구절을 읽게 됐다.

프로그래머들이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명언 중에 하나가, '사용자들은 절대 네가 상상한 대로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는다'일 정도.
그러다 보니 상정 외의 상황에서는 미처 파악하지 못한 버그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런 걸 노리고 일부러 이스터 에그를 숨기기도 하지만, 프로그래머 입장에서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을 벌이는 경우에만 튀어나오는 버그도 종종 있다.


즉 창조자 혹은 절대자의 의도가 무엇이든 세상은 내가 상상한 방법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라는 프로그램의 사용설명서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 방법은 나에게 달린 것이다.
상상도 못 한 일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런 일을 벌인다면 내 삶에 버그가 튀어나온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았거나 상상조차 못 한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 역시 제주에서의 삶을 시뮬레이션하고 블로그에 글로 적었더니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기고 있다.




그것을 아는가?
벌레 먹은 과일이 더 달고 맛난다.
내 삶도 벌레를 먹어 더 달아지고 있다.

드디어 나의 시뮬레이션에 버그가 일어났다.





GIF 출처 -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