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여름, 그와 나는 송당리로 휴가를 왔고 이른 아침에 산책을 위해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는 고요함.
뻥 뚫린 도로.
지나다니는 차들은 보이지 않는다.
전형적인 제주 구옥들이 모여진 동네의 모습이 아기자기하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산책하기 좋은 날씨다.
송당리 큰 길가로 나온 후 어디로 갈지 잠시 고민한다.
어차피 동네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물어볼 동네 주민들도 안 보인다.
이 시간에 문을 열고 장사를 하는 가게는 한 군데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큰 도로를 건너 직진하기로 한다.
햇살은 뜨겁고 그늘은 누가 지워버린 것처럼 길가에 희미하게 누워있다.
이 넓고 푸른 공간에 오직 그와 나 둘만 있다.
모험이 시작됐다.
물이 바짝 마르고 풀들만 길게 자란 수로의 제방 위에 올라 걷는다.
오랜만에 만나는 자유가 느껴진다.
꽤 오래 걸었음에도 지루하지가 않다.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다.
저 멀리에 갖가지 풀이 섞여 자라는 정원이 보인다.
수국도 피어있고 색 바랜 털수염풀도 길게 자라 바람과 춤을 추고 있다.
춤추는 이들 외에 아무도 없는 이상한 정원이다.
그와 난 주변을 걸으며 사진을 남긴다.
바로 앞에 유리온실처럼 이쁘게 지어진 큰 건물이 하나 보인다.
가까이 가보니 바닥에 화초와 야생화 모종들이 가득하고 입구엔 작은 간판 하나가 놓여있다.
송당나무.
불은 꺼져있고 역시나 문은 열려있지 않다.
이제서야 느낌이 왔다.
아침 산책을 나선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문이 열린 곳이 없다.
서울에서 놀러 온 우리의 활동 시간과 제주 사람들의 활동 시간이 서로 틀린 것이다.
휴가를 온 우리는 마치 일을 하듯이 시간을 꽉 채워서 산책을 했고 제주 사람들은 모두 집에서 여유를 즐기는 듯 땡볕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날은 더웠고 우리는 시원한 음료 한 모금이 아쉬웠지만 아쉽게 발길을 돌려 오던 길로 돌아가야 했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처음 와봤음에도 내 기억 속에 있던 장소였음을.
그 후 남은 일정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사진을 클라우드에 옮기면서 다시 춤추는 정원 사진을 보고 깨달았다.
어? 나 여기 아는 곳 같은데?
아득히 먼 아주 오래된 기억이다.
인간극장을 보고 있었는데 젊은 부부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제주로 내려와 정원을 만드는 이야기였다.
원예업에 관련된 일을 하던 부부는 제주에서 땅을 가꾸고 다양한 수종의 식물들을 넓은 땅 곳곳에 심는다.
아직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부부는 그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도 자녀들과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시리즈로 몇 편이 나왔던 이야기였다.
그때 제주라는 땅에 대해서 처음 호기심을 가졌고 나중에 한번 꼭 저 장소에 놀러 가서 정원도 보고 사장님 부부도 봐야지하는 마음이 있었다.
같은 내용의 인간극장을 그 후에도 또 본 것 같다.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10년이 훌쩍 넘은 어느 날 우연처럼 그 장소에 다다른 것이다.
송당리라는 기본정보도 아예 없었다.
2021년 여름, 그와 나는 다시 제주로 휴가를 왔고 송당리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이번엔 제주민들의 시간에 맞춰 송당리로 출발했다.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자 1년 전 그 장소 송당리로 돌아왔다.
날짜도 하루정도 차이나는 딱 1년 만이다.
그와 나는 기억을 살려 우리가 들렸던 식당과 카페 등을 눈으로 더듬어 찾아보았다.
그 사이에 새로 건물을 짓는 곳도 보였고 골목 안쪽에도 한창 공사 중인 곳이 꽤 되었다.
예전 기억과 일치하지 않은 장소에 우리가 자주 갔던 식당이 있었고 동네에서 유명한 풍림다방은 길 건너편 큰 2층짜리 구옥에 새로이 자리를 잡았다.
왠지 1년마다 이 동네로 와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한 바퀴를 천천히 돌고 난 계획했던 대로 송당나무카페를 찾아서 걸어갔다.
동네 한가운데는 꽤나 큰 공사를 한 흔적이 있었고 선사시대 유적처럼 타운하우스 집터와 주거지를 둘러싼 돌담만 쌓여있었다.
그와 나는 아무도 지키는 이 없는 100년 후에나 인정받을 듯한 유적지 터에 발을 들여놓았다.
멀리 길을 돌아가는 것보다 직선으로 낮은 돌담들을 건너가는 것이 훨씬 빠를 듯했다.
다시 모험이 시작됐다.
우린 미로 같은 터를 지나 돌담 앞에 멈추었고 하나씩 용기를 내어 넘어갔다.
돌담을 넘어가자 검은흙으로 덮인 넓은 밭이 나왔다.
그 밭의 끝에 나무와 잡초들로 우거진 입구가 보였다.
밭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외곽선을 따라 걸어갔고 잡초로 둘러싸인 입구에 도착했다.
앞을 둘러봤다.
커다란 나무집이 보였고 그 집 앞엔 송당나무로 통하는 큰길이 보였다.
드디어 멀지 않았다.
기쁜 마음으로 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집 앞 수풀에서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우리를 보더니 짖어댔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겁이 났지만 지나가도 괜찮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개의 사나움과 짖는 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그래도 개의 위치와 지나다니는 통로 사이엔 꽤 거리가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며 손 흔들어주면 괜찮지 않을까.
아... 그런데 수풀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개의 목에는 목줄이 달려있지 않았다.
지금은 거리를 서로 유지하고 있지만 조금 더 가까이 가면 달려들 것 같았다.
우린 뒷걸음질을 쳤고 다시 잡초들 뒤편으로 돌아 나왔다.
최대한 개를 피해 빠른 걸음으로 밭의 외곽을 걸어갔고 아무리 둘러봐도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넘어야 할 높은 돌담뿐이다.
돌담은 그냥 넘기엔 조금 높았고 내가 뒤에서 손을 잡아 중심을 잡아주어야 그가 겨우 천천히 넘을 수 있었다.
넘는 중에도 흔들리는 돌을 잡아야 했다.
그가 먼저 넘어간 후에 반대편에서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고 나도 발끝을 올려 한 발을 겨우 넘기고 돌이 흔들리자 잡은 채로 다시 있는 힘껏 키를 늘려 넘어갔다.
두 발이 닿자마자 황급히 돌담 주변에서 빠져나왔다.
눈앞에 드디어 송당나무로 향하는 예전 그 길이 나왔다.
저 멀리 송당나무가 보였다.
주차된 차와 사람들이 보인다.
열려있다. 방금 전의 아찔한 기억도 바로 잊혔다.
우린 작은 다리를 건너 입구까지 걸어갔다.
입구 앞에는 여자 사장님이 식물에 물을 뿌려 샤워를 시켜주고 계셨고 이상한 꼴을 하고 나타난 우리에게 웃어주셨다.
바로 알 수 있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나이를 드셨지만 인간극장에서 보았던, 당차게 맨땅을 정원으로 일군 여주인공이었다.
나는 묘한 희열감을 느꼈다.
드디어 인간극장의 주인공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꾸벅 인사를 드리고 카페 안으로 입장했다.
카운터에는 등치 좋고 인상 좋으신 남자 사장님이 계셨다.
나는 기쁨을 감춘 채로 한라봉 에이드 두 잔을 주문했다.
둘러보니 주변엔 사장님이 쓰신 책도 있었고 식물들로 가득했다.
우린 계단을 올라가 2층에 자리를 잡았다.
1층엔 손님이 여럿 있었지만 이곳엔 우리뿐이었다.
둘러보니 엔틱 한 느낌의 소품과 가구들이 채워져 있었다.
사장님들의 취향을 느끼며 잠시 공간에 나를 내려놓았다.
우리의 타버린 목구멍을 구원해 줄 시원한 한라봉 에이드.
달고 시원하다.
제주의 맛이다.
작년에 조금만 천천히 왔어도 더 일찍 깨닫고 이 공간에서 시원한 에이드를 마셨을 텐데.
아쉬웠던 만큼 기쁘다.
드디어 오랜 숙원을 풀었다.
인간극장의 주인공들을 만나고 인사했다.
작년에는 우연이었고 이번에도 우연을 가장한 채로 평범한 손님으로 와있다.
전경이 탁 트이는 높은 층고가 괜히 설레었다.
밑을 내려다보니 남자 사장님이 열심히 카운터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1층의 손님들은 차를 타고 떠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밑으로 내려갔고 정원으로 향하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작년에 모르고 발을 들여놓았던 정원은 카페 이용 손님들만 입장 가능한 곳이었다.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번에도 우리밖에 없었다.
여전히 뜨거웠고 수많은 종의 크고 작은 식물들이 자라 있었다.
보인다.
아주 오래전 화면에서 보았던 아무것도 없이 검은흙으로만 가득했던 정원이...
그 돌과 흙더미에 정성스레 길을 만들고 어린 식물을 심던 젊은 부부의 모습이.
시간이 지나 그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뜨거운 태양과 거센 바람을 견뎌내며 성장하였고 부부의 보살핌 아래 지금의 아름다운 정원이 되었다.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입구 쪽으로 돌아오자 커다란 개집에 짖지 않는 개 한 마리가 더위에 헉헉대고 있었다.
갑자기 개를 피해 도망간 일이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그래. 개의 영역을 침범했으니 당연히 짖었겠지.
우리는 짐을 챙기고 내려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사장님 부부는 이미 저 멀리서 다른 공사를 하고 계셨다.
송당나무와 정원의 모습을 조금 더 눈에 담아둔 채 큰길로 나왔다.
잘 있어. 송당나무.
사장님 부부도 건강하세요.
1년 후에 다시 송당에 온다면 꼭 들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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