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활주로는 제주로

제주와 헤어질 결심

낮가림 2022. 8. 2.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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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모드는 나를 붕뜨게 한다.




어제는 휴가가 끝나고 첫 출근 날이었다.
왜인지 제주가 자꾸 어른거렸고 이 장소가 나의 직장이라는 것이 낯설었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마음은 자꾸만 출렁거렸다.
이 어지러움을 바로 잡고자 일탈을 하기로 했다.
코로나가 시작된 후 2년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극장에 가기로 한 것이다.
난 퇴근길에서 멀지 않은 극장에 예약을 잡았다.
정말 오랜만의 영화다.




예약한 영화는 사랑하는 박찬욱 감독님과 정서경 작가님의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다.
사실 나는 이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를 제주에 가서 관람할 생각이었다.
왜인지 제주에서 휴가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면 상영하고 있는 극장을 찾기 힘들 거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제주에서 지내기로 한 서귀포의 숙소에서 동쪽으로 쭉 가면 서귀포에 딱 한 군데 있는 극장이 있었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이미 상영관이 내려가는 중이었고 그나마 있는 상영시간은 너무 늦었다.
무엇보다 같이 제주에 동행하는 친구 녀석을 설득하기 힘들었다.



난 결국 제주에서 헤어질 결심을 관람할 결심을 포기해야 했다.
헤어질 결심은 내가 제주로 떠나기 며칠 전에 각본집으로 출간되었고 알라딘에서 미리 예약 구매를 하고 여행을 갔었다.
그리고 제주에서 있는 동안 서울의 집 문 앞에 택배가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만약 제주에서 헤어질 결심을 관람하고 서울에서 바로 각본집을 읽었다면 최적의 동선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무엇보다 제주에서 극장 관람 체험을 하며 영화를 보는 이상한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퇴근길을 헤치고 도착한 곳은 메가박스 이수.
오랜만에 도착한 영화관은 조용했고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무인발권기가 사방에 가득한 로비.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천천히 둘러보았고 무인발권기에서 매점 음료수 아이스카페라떼를 주문해서 한 손에 들었다. 긴장되는 마음을 가지고 상영관으로 이끌어줄 에스컬레이터에 한 발을 올렸다.
입장시간이 되자 아르바이트생처럼 보이는 남자분은 입장하세요 한마디만 하고 사라졌다.
모바일 티켓을 화면에 띄운 채 기다리던 나는 당황한 채로 상영관 안으로 입장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극장광고가 상영됐고 나는 조금씩 긴장이 풀렸다.
영화가 시작되려 하자 나는 스마트폰의 설정을 비행기 모드로 바꿨다.
나는 이때의 기분이 참 좋다.
제주로 떠나기 위해 이륙하는 비행기에서 고도에 다다르기 전 폰의 설정을 비행기 모드로 바꿔달라는 기내방송이 나오면 의식적으로 따른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마치 비행기 좌석에 않은 듯이 폰의 설정을 비행기 모드로 바꾸는 행위가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들게 한다.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난 다시금 영화라는 존재와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헤어질 결심은 사랑이라는 에너지를 상당히 박찬욱스럽게 표현하는 이야기였다.
박해일이 연기한 해준이라는 형사 역할도 상당히 매력적이고 꼼꼼했지만 이 영화는 탕웨이를 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껏 헤어질 결심을 보기 전까지 탕웨이가 주연한 영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서투룬 한국말과 다른 세상의 언어처럼 들리는 중국어를 함께 구사하는 중국인 여자 서래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




돌산과 또 다른 산 그리고 파도치는 거칠은 바다까지 이어지는 영화의 배경은 또 다른 주인공 안개와 함께 한 편의 신화 같은 구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곳이 있는 곳을 바로 얼마 전에 다녀왔기에 좀 더 감정이입이 잘 되었다.
내가 다녀온 서귀포의 산은 산방산이라는 돌산이었고 그 앞이 바로 드넓은 바다였다.
그래서 마치 영화 속 장면 전환이 제주에서의 내 시점처럼 느껴졌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나는 비행기 모드를 해지했다.
서울로 착륙한 것이다.
비행기 모드와 헤어질 결심과 함께 붕 떠오른 나의 마음은 다시 중력에 이끌려 땅에 닿았다.
현실에 안착한 것이다.
엔딩 크레디트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다가 나는 상영관을 천천히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동안 난 생각에 빠졌다.
제주 휴가를 갔다 오고 서울로 돌아온 후 난 이틀 정도의 시간 동안 잠시 멍해있었다.
약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왜 내가 집에 있을까 하는 어색한 이질감이 들었다.
빨리 제주로 다시 돌아가야지 하는 생각이 아니라 왜 내가 서울에 있는 건지 적응이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알았다.
아마도 제주와 사랑에 빠져있나 보다.
지금 제주는 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제주와 헤어질 결심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
난 깨달았다.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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