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활주로는 제주로

제주와 야자수 나무

낮가림 2022. 8. 2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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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깨달은 제주를 대표하는 세 가지는
바람, 삼다수, 야자수 나무다.






나는 야자수 나무를 볼 때마다 묘한 감정에 빠진다.
서른이 넘은 후에도 야자수 나무는 영화나 사진으로 본 하와이나 멋진 섬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휴양지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보면 거대한 항공기가 미지의 섬에
추락하여 살아남은 사람들끼리의 생존투쟁이 시작된다.
다양한 성격과 과거를 가진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인물들의 배경이 되어주는 거대한 존재는 울창한 자연이 펼쳐진 섬과 바다다.
드라마 전체를 대표하는 미지의 섬은 높고 커다란 야자수 나무들이 가득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가 숲 속에서 움직일 때마다 사방으로 흔들린다.




위치도 모르는 외딴섬에 추락하여 문명과 등지고 살아가야 하는 사건은 겪고 싶지 않지만, 인물들이 서로 어울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 번쯤은 저런 섬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상상을 했었다.
그 상상 속에는 추락한 비행기 잔해 위로 우뚝 선 야자수들이 있었다.
오래전 나는 대한민국 하면 동양적인 소나무나 대나무가 떠오르고 그 외의 서양이나 열대지방은 야자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식물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 여러 종류의 식물을 알지만 그때는 그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훗날 인터넷이나 영상, 사진으로 한국에도 남해나 제주도에 야자수 나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그때는 눈으로 직접 확인할 기회가 없었다.
야자수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야자수 나무는 뜨거운 여름 관광지에서 사랑받는 하와이안 셔츠에 그려진 그 높고 날씬한 야자수 나무다.
대나무처럼 높고 매끈하면서 아름다운 잎을 달고 있는 야자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물이다.
높은 빌딩을 바라보듯 눈이 부신데도 고개를 들어 높이 올려다보면 마치 쥬라기 공원에서 나오는 가장 큰 초식공룡인 브라키오사우르스의 길고 굵은 목을 보는 듯했다.




나는 제주에 가기 전 가족과 함께 태국 푸켓으로 여행을 갔었다.
도착한 시간이 새벽이라 가로등이 거의 없는 어두컴컴한 마을에서는 주변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눈을 비비고 풀빌라 숙소에서 나온 나는 난생처음으로 거대한 야자수 나무를 보았고 그 낯선 이미지에 푹 빠져서 한동안 바라봤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이파리가 생동감이 넘쳤다.
그 모습만으로 나에게 푸켓은 다시 가고 싶은 도시가 되었다.




꽤 시간이 지나 제주로 여행을 왔던 나는 공항 주변에 가득한 야자수를 보며 그 낯섦과 생동감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여름 제주에 방문했을 때도 멀리서 보이는 야자수 숲을 보며 미소를 지은 적이 있었다.
로스트에서 보던 거대한 야자수 정글처럼 느껴졌다.
제주도는 예전부터 흔히 바람, 여자, 돌이 많다고 해서 삼다도라고 불렀다.
여전히 바람은 많지만 여자는 관광으로 오신 외지분들을 더 많이 보았고, 돌은 개발과 신축으로 지은 집이 많아서 단순히 담벼락이나 장식의 용도 정도로만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깨달은 제주를 대표하는 세 가지는 바람, 삼다수, 야자수 나무다.
이것은 아마도 세대별로 다 틀릴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제주를 관광지, 맛집, 사진 찍기 좋은 곳, 오름, 둘레길, 고등어회 등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고등어회도 넣고 싶었지만 앞에 세 가지가 더 강했다.




나는 제주의 야자수 나무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시원하게 삶을 살아가고 싶다.
훗날 제주에 내가 꿈꾸는 집을 짓게 된다면 높은 야자수 나무를 집 앞에 심고 싶다.
집안에 아무런 식물을 키우지 않아도 밖으로 보이는 야자수의 존재감에 마음이 편안할 것이다.
이국적이고 낯선 야자수 나무, 제주를 참 많이 닮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