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지워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제주에서의 과거를.
모두 지워야만 추억하지 않고 지금을 살 수 있다.
난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뒤로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마다 한달이다.
과거를 돌아보며 알게 된 사실은 실제 제주에 있었던 날은 열흘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날들을 반복적으로 추억한 시간들을 합한 날이 훨씬 길었다.
난 걱정과 후회도 아닌 과거의 기쁨을 만끽하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한 것이다.
행복한 추억과 경험이었지만 내가 제주를 향해 나아갈 때마다 힘이드는 날은 과거의 추억을 불러와 대리만족으로 끝내버릴 것이다.
지금의 나에겐 추억은 중요하지 않다.
살아보지 않은 미래 또한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순간 내가 제주에 있다는 현실인식이 필요할 뿐이다.
서울의 탁한 공기가 아니라 바람이 섞여 물처럼 부드러운 제주의 공기를 마시고 있다고 세뇌되는 것이다.
![](https://blog.kakaocdn.net/dn/clpdjn/btrvJTv02F9/ksiHYSkIT8jNqZV1VrBSA0/img.jpg)
돌담밑에서 자란 이끼와 이름모를 식물들을 만지며 감각을 되새기고 있는 과거의 내가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손으로 쓸어내리며 이끼의 감촉을 느끼고 있다.
동트기 전 새벽녁의 습기를 머금어 살짝 차갑게 눅눅해진 돌담의 이끼들.
감각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려 애를 쓰고 있다.
난 조용히 뒤로 다가가 그의 손 앞에 있는 이끼위에 죽은 생선을 올려놓는다.
조용히 이끼를 쓰다듬던 나는 죽은 생선의 물컹한 비늘을 만지자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손을 뺀다.
이끼의 감촉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건 여전히 이끼지만 풀냄새가 아닌 비릿한 향이 올라온다.
다시 만져볼 용기를 내지않고 돌담에서 멀찍이 거리를 둔다.
과거의 즐거운 추억이 낯선 체험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것으로 난 돌담의 이끼를 다시 만져보는 감각을 되살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뒷걸음으로 한 발짝.
텅 빈 도로 위에서 강한 제주바람을 맞고 있는 내가 보인다.
바람은 끊이없이 불어대며 나의 머리와 옷들을 휘날리게 만들고 있다.
귀에는 바람소리만으로 가득차 있다.
눈을 감은채 체험을 하고 있는 내옆에 친구가 똑같은 자세로 서있었다.
그는 따로 소환한 것이 아니라 그날의 기억속에 그가 같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가 느끼는 감정은 알 수 없다.
난 바람을 맞아가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옆에서 나타난 나를 보더니 그는 당황했다.
눈감은 내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내게 물었다.
"여기는 뭐하러 왔어?"
체험하는 내가 아닌 관찰자로 온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러는 너는 옆에 서서 뭐하는 거야?"
"난 그냥 이 시간속에서 네옆에 계속 서있을 뿐이야."
"언제까지?"
"네가 이시간을 잊을 때까지 영원히."
"이게 현실이 아니란건 알고 있지?"
"응. 잘보면 아스팔트 사이로 이불의 무늬가 나와있거든."
"어... 그러네"
"과거를 소환했지만 완벽하지 않은 거지."
과거의 나는 바람의 세기와 감각에만 집중하느라 주변 풍경을 완벽히 되살리지 못했다.
현실의 나는 이불 위에 누워서 베게에 턱을 괴고 상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빨간버튼이 달린 작은 리모컨을 상상했다.
리모컨이 손에 쥐어지자 바로 버튼을 눌렀다.
강한 바람이 멈춰버렸다.
눈을 감고 있던 나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람이 멈춰버리다니.
나는 다시 감각을 느껴보려고 하지만 바람은 불지않는다.
현실을 인식한 나는 더 이상 감각을 불러오지 않는다.
옆에 서있던 그는 리모컨을 들고 있는 나에게 미소를 지어준다.
난 추억하는 습관을 또 하나 지운 것이다.
다시 뒤로 한 걸음.
발뒤꿈치가 무엇인가에 걸린다.
나도 현실로 돌아온다.
문턱에 발이 반쯤 걸쳐져있다.
내 정신도 현실과 과거에 반쯤 걸쳐져 있었다.
난 추억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다.
그 살아갈 날에 과거를 사는 시간이 추가되면 안된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이 행복해야 한다.
난 앞으로 한 걸음 걸었다.
지금을 살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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