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밑에 닿는 느낌이 촉촉하다.
빗물에 젖은 이끼와 야생의 풀들이 낯선 방문자에게 소리없이 감각으로 전해주는 듯하다.
황토색 흙바닥 곳곳엔 말의 배설물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와 나는 지뢰게임을 하듯이 발밑에 시선을 집중하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 길을 벗어나자 숲의 전경이 보였다.
한경면 청수리 청수곶자왈.
제주어로 곶은 숲, 자왈은 덤불을 뜻하고 수풀과 덤불로 이루어진 야생의 숲을 말한다.

이 숲을 처음 알게 된것은 KBS에서 방송한 힐링다큐 나무야나무야를 통해서다.
가수 아이유가 출연한 방송이었다.
아이유의 감성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던 비오는 곶자왈의 풍경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 가보자.
아이유가 방문한 장소로 여행의 테마를 잡았고 첫번째가 삼다수숲, 두번째가 청수곶자왈이었다.
삼다수 숲이 있던 동쪽에서 완전 반대인 서쪽으로 이동하는 여행이었다.
한경면 청수리에 숙소를 잡고 목적지까지 카카오 택시를 이용해 이동했다.

가는 길에 비가 떨어졌고 날씨는 금방 흐려졌다.
제주의 공기는 완전히 물기를 머금은 듯했다.
바람불거나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나는 설레이는 맘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이동중에 맘에 드는 풍경이 보이면 표지판에 적힌 동네의 이름을 메모앱에 기록해 놓았다.
오늘은 그냥 지나치지만 나중에 다시 방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청수리에 도착했고 송당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의 동네였다.
택시는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갔고 양옆으로 청귤이 달린 귤나무가 가득했다.
택시는 마을의 건물들과는 다른 분위기의 펜션에 도착했고 그곳이 우리의 숙소 청수1789였다.

코로나로 정시 체크인만 가능했기에 우린 사장님의 도움을 받아 문 안쪽에 짐들만 넣어논 채로 다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
비가 계속 떨어져서 마땅히 쉴곳이 없었다.
우린 빠른 판단으로 타고 온 택시를 타고 청수곶자왈로 향했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초록 잎들에 물방울이 올려져 있거나 눈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햇살 없는 흐린 날씨에 청수 곶자왈은 어둠의 숲 그 자체였다.
그는 나보다 반걸음 먼저 걸어갔다.
얼마전에 그는 이 숲을 방문한 적이 있었고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이 숲의 길잡이가 되어 나의 걸음을 이끌었다.
그는 나에게 조심하라고 알려주었다.
"숲속에 야생노루가 있으니 너무 빨리 걷지마."
우리는 야생 동물들이 인간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인기척을 남겨야 했다.
숲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이 울창했고 비가 와서 그런지 습한 공기와 함께 기묘한 분위기를 보여줬다.

숲에는 작은 이정표들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우리의 위치가 어딘지 확신할 수 없었다.
걸을 때마다 나의 발목을 숲의 잎과 풀들이 매만지며 스쳐 지나갔다.
숲이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온 목적을.
나는 삼다수숲에서 그랫듯이 여기서도 질문을 하려했다.
수많은 이방인들이 이 숲을 찾아왔을 것이다.
난 그들과 다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질문은 결과를 낳고 그 답을 숲은 어떤식으로 보여줄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다수 숲은 행복한 가족의 모습으로 내게 답을 주었다.
그러나 청수곶자왈의 분위기는 삼다수 숲과 사뭇 달랐다.
단지 비가 오고 안오고의 차이가 아니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나를 흔들수도 있었다.
그만큼 나약한 인간이었다.
숲의 깊은 곳까지 들어 왔을 때 나는 내면 깊은 곳에 걸려있던 작은 질문을 용기내어 토해냈다.
"저는... 제주를 진짜로 좋아하는 건가요? 아니면... 홀려있는 건가요?"
숲은 정적으로 조용했다.
물론 내 마음 속의 외침이었고 앞서 걷던 그는 듣지 못했다.
숲은 들었을까?
다시 말해야 하나?
그때 숲의 어두운 곳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나와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노루거나 정체모를 야생동물이 분명했다.
잠시 후 그들은 더 깊은 곳으로 사라졌고 우리는 떨림을 유지한채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숲의 길은 여러 갈래였고 길잡이인 그도 헤매기 시작했다.
문득 내가 이곳을 찾은 첫 이미지가 떠올랐다.
아이유가 동그란 눈으로 숲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모습이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다.
우연처럼 맞아 떨어진듯 내가 본 이미지 그대로 였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비는 더 축축히 내렸고 우린 결정을 내려야 했다.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과거를 탐험하듯이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갔다.
처음엔 숲의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면 다시 돌아가자 숲의 다양한 식물들이 눈에 띄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들을 보니, 내 생각속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수없이 많은 감정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사랑, 분노, 슬픔등이 아닌 딱히 이거라고 지칭할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그것들은 항상 어둠의 내면 속에 숨어있었고 가끔 몰래 나와 나의 기분을 혼란스럽게 했다.
내가 나의 감정을 인지할 수 없을 때 느끼는 당혹감은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건 마치 숲속에 숨어있던 야생동물의 정체를 알 수 없어서 긴장해야 했던 순간들과도 같았다.
날은 조금 더 어두워졌고 우리는 조금 더 빠르게 이동했다.
어느 새 나는 스스로 던진 질문을 잊고 있었다.
사람은 매순간 수많은 생각을 하고 그 생각들이 질문을 망각속으로 밀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물에 젖은 땅을 오래 걸으니 체력도 떨어지고 허기가 졌다.
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숲이 자라난 느낌이었다.
더 어두웠고 깊으며 울창해진 기분이었다.
여전히 잎과 풀들이 발목을 매만지고 있었다.
수많은 작은 손들이 숲에서의 퇴장을 아쉬워하는 듯했다.
조금만 더 놀다가라는 듯이.
더 어두워지면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많은 환상을 체험할 수 있다고 우릴 유혹하는 듯했다.
수많은 숲의 정령과 야생동물들이 어둠속에서 기어나올 것이다.
이미 어두워진 숲이니 더이상 어둠속에 머무를 필요도 숨을 필요도 없다.
그때는 네발달린 짐승도 두발로 걸어다닐 것이며 그들의 눈에서 나오는 광채와 반딪불이의 작은 초록 횃불만이 숲의 유일한 빛일 것이다.
숲의 나이만큼 오랫동안 존재한 나무의 정령들은 우리의 앞길을 막을 것이다.
이끼위에 올라온 작은 요정들은 괴상한 생김새로 사람흉내를 내며 우리의 관심을 끌것이고, 점차 숲에서 나가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망각속으로 미끄러질 것이다.
나의 의식은 점점 숲의 환상에 빠져들었고 내면의 어둠속 이름모를 감정들이 기어나와 내 감정의 살을 잡고 연주를 시작했다.
그 연주에 내 마음은 흔들렸다.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의 발은 리듬에 따라 멈추거나 더 천천히 걸었다.
숲이 던져놓은 덫에 걸린 것이다.
우리의 발걸음은 더디었고 난 여전히 숲이 보여주는 꿈에 사로잡혔다.
악몽같은 환상에 빠져있던 찰나 눈앞에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였다.
투명우산을 들고 가디건과 체크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여자.
분명 여름인데도 겨울 옷차림을 한 그녀는 청수곶자왈에 왔었던 아이유였다.
그녀는 잠시 뒤를 돌아 우리를 보더니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빨랐고 나의 발은 어둠의 연주가 들려주는 리듬을 무시한채로 빨리 걷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아이유의 환상이 보이는 걸까?
생각이 많아 환상을 보는 나에게 길을 안내하려고 뇌가 불러온 존재일 수도 있다.
이 숲을 찾아온 이유가 그녀였으니 가장 믿고 따를 수 있는 안내자의 모습으로 나에게 보여줬으리라.
나는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고 더 빨리 걸었지만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집중하는 동안 어둠의 환상은 점점 사라져갔고 정령과 요정, 짐승들도 숲의 깊은 곳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밝은 숲이 보였고 그녀는 사라졌다.
그녀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환상은 모두 사라졌고 조금 더 걸으면 우리가 들어온 입구였다.
이제 미로는 끝났다.
그리고 그제서야 내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해졌다.
결국 나는 제주에 홀린것인가?
내가 보는 수많은 환상이 그에 대한 답인 걸까.
확실한 정답은 모르지만 제주가 나에게 수많은 영감을 준다는 건 이미 체험했다.

청수곶자왈에서 나와 버스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오지않았고 우린 숙소를 향해 다시 걸어야만 했다.
저 멀리 청수곶자왈 숲의 지붕이 보였다.
초록초록한 그곳은 누군가 숨어서 나를 지켜보는듯 했다.
어쩌면 숲의 기운과 내 감정의 기운이 잘 맞아서 환상을 본 것일수도 있다.
그것은 신선한 경험이었고 난 그들과 더 오래 함께하고픈 아쉬움이 일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난 정말 깊이 홀려서 숲에 먹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유가 나타나 서둘러 길을 안내했을 것이다.
이제는 보이지않는 그녀에게 난 꾸벅 작별인사를 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난 내 생각속의 일부를 숲에 떼어놓고 온듯했다.
오래지않아 내가 다시 방문한다면 그녀는 다시 길을 안내해줄 것이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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