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날이 꽤나 더웠다.
초여름의 습함을 경험했다.
예상치 못한 뜨거운 날씨 앞에서 모두가 힘이 빠져버렸다.
내 마음속에서는 어서 모든 걸 정리하고 제주로 떠나가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서 차가운 커피 한 잔을 하고 싶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고 눈을 감은 채로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나는 삶을 바꾸고 싶었다.
걱정이다.
걱정하면 안되는데 걱정이다.
우리 집엔 에어컨이 없다.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집엔 에어컨이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부채와 선풍기로 살아왔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매년 덥다고 하면서도 암묵적인 룰인지 부모형제 그 누구도 에어컨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기록적인 더위를 기록했던 오래전 여름의 어느 새벽엔 자다가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빨리 출근해서 회사로 달려가 에어컨 바람을 맞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냉동실에 물이 가득 든 페트병을 넣어놔서 땡땡 얼렸고 자기 전에 다시 꺼내어 내 배 위에 올려둔 채로 잠이 들었다.
만져보면 배는 아주 차가웠지만 더위 앞에선 시원한 정도였다.
진공텀블러에는 각얼음과 차가운 물을 가득 부어놓고 자다 깨면 시원한 물을 마셨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텨왔다.
에어컨 없이.
나는 제주 숙소에서 에어컨을 가장 낮은 온도로 맞춰놓았다.
집에서 누리지 못한 호사를 누리기 위해 외출을 제외하면 항상 틀어놓고 있었다.
따뜻한 욕조 물이 담긴 자쿠지에 들어갔다가 거실로 올라오면 느껴지는 찬 기운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난 그때 알았다.
나는 더위를 참고 인내하는 것을 즐기는 게 아니라 그저 에어컨이 없었을 뿐이다.
몸살 기운으로 누워서 이불을 둘러쓴 그가 있었음에도 난 에어컨을 틀었다.
한번 누린 풍요는 멈출 수가 없었다.
겨울에도 난 써큘레이터를 틀어놓고 잔다.
에어컨에 대한 미련인 걸까?
따뜻한 이불속에서 찬 공기를 느껴보려 하지만 그게 될 리가 없다.
생각해보니 나는 여름에 태어났다.
여름의 기운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내 몸은 겨울에 맞춰져 있다.
그 어떤 매서운 바람과 한기가 흘러도 내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인가 반대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이번 여름도 맨몸으로 나야 할지도 모른다.
더위 앞에서 잠시 미소는 잃겠지만 난 늘 그래 왔듯이 계절과 타협할 것이다.
계절은 오래 머무르지 않고 돌아갈 테니까.
그 빈자리가 아쉬울 때 다른 계절이 찾아온다.
나의 계절은 여름도 겨울도 아니다.
봄과 가을도 아니다.
나의 계절은 반이 거의 지났고 이제 반이 남았다.
아무 준비되지 않은 나의 계절은 참으로 쓰고 썼다.
가끔 달고 단 그런 날도 있었지만 잠시뿐이었다.
감정의 계절은 우울함과 슬픔 그리고 무력함이었다.
운명을 바꾸지 못한 어느 젊은이의 한이었다.
뜨겁지도 춥지도 않은 나의 계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일은 봄비가 내린다고 한다.
인간의 감정은 날씨에 좌지우지되나 보다.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잠깐 몸이 힘들었으니 이때 만이라도 날씨에 의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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