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활주로는 제주로

제주를 쫓느라 서울을 잊었다

낮가림 2022. 4. 1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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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원래대로라면 토요일까지 일한 피로를 덜기 위해 오전 내내 잠을 잔다.
그러나 웬일인지 일찍 잠이 깨었다.
정신이 맑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시간이다.
베지밀 에이 두유를 마시면서 어항 속 공기방울 소리를 듣는다.
그동안 물고기가 존재했다는 것도 잊은 채 관심을 끄고 살았다.
자기 계발과 명상, 주식, 브랜딩, 부업, 창업에 관한 책과 유튜브 영상들을 찾아보느라 집안의 다른 존재에 대해선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구피들이 계속 새끼를 낳았고 지금은 어항을 가득 채웠다.
예전에는 구피가 새끼를 낳으면 은신처를 마련해주고 작은 통으로 멸치보다 작은 아이들을 하나씩 잡아 새끼들만 살 수 있는 미니어항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조금씩 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시간이 흐르자 새끼를 낳는 과정도 흔해지고 관심이 사라졌다.




살아있는 생물에게도 이럴진대 물건들은 어떻겠는가.
오래된 낡은 가구들과 집안의 벽지, 창문, TV, 냉장고 모두 관심을 두지 않은지 오래다.
일터에서도 퇴근 후 집에서도 난 제주에만 살고 있다.
여름휴가 때 놀러 갔던 숲과 펜션 숙소에서 봤던 아늑한 풍경을 상상하며 난 제주라는 바다에 잠수한 것처럼 빠져있었던 것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을 아끼고 존중해야 한다.
집안의 가구와 벽, 물건들 모두 오래되고 소중한 존재들이다.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라도 오랫동안 만져졌고 우리 가족의 역사를 지켜봤던 존재들이다.
그들에겐 우리 가족의 기운들이 실려있고 실제로 그러하다고 믿는다.
내가 자주 만지고 사용한 물건에는 내 기운과 에너지가 가득 실려있다고 믿는다.
내가 집 밖에 있어도 자주 생각한 집안의 물건에는 나의 사념이 깃들 것이다.
그래서 그런 물건들을 모아 제주로 함께 갈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니 나는 제주에서 그들은 서울에서 서로 생각하고 그리워할 것이다.




내가 쓰는 이불과 베개에는 나의 채취가 묻어날 것이다.
자는 동안 수많은 악령과 보이지 않는 존재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유일한 방어막이다.
이불까지 들고 가지는 않겠지만 나의 채취와 기운들은 남아 여전히 집에 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집으로 가까워질수록 그 기운들은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며 반길 것이다.
내가 사랑한 무생명의 존재들.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람답게 만들어줬던 의식주들.
너무 자주 입어 많이 낡아버린 옷들.
나의 살과 에너지가 되어준 냉장고 안의 음식들.
나를 길러주고 지켜준 오래된 나의 서울 집.
이제 나는 안다.
그것들이 모두 나의 한계를 만들기도 했지만 그 한계를 깨닫기 전까지 유일한 나의 세상이었음을.
사랑한다.
이 지긋지긋한 녀석들아.
어릴 때 벽에다 코딱지 붙여놓은 거 미안해.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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