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활주로는 제주로

제주가 부른다

낮가림 2022. 1. 25.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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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첫 제주도 여행의 밤은 정말 기묘했다.
넓은 평지에 우뚝 솟아 오른 오름의 모습은 거인의 무덤 같기도 했다.


숙소로 걸어서 돌아가는 길 유일한 이정표는 불켜진 주택이었다.
나에겐 어둠이 내린 제주의 밤은 처음이었고 친구는 아니었다.
어둠을 눈으로 더듬으며 조금씩 앞으로 헤쳐나갔다.
뒤돌아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그대로 어둠이 밀려와 있었다.
저 멀리 숙소의 마당에 걸어 놓은 전구의 불빛이 보였고 우리는 무사히 밝음에 몸을 노출시켰다.
온몸에 묻어있던 어둠은 살며시 씻겨 내려갔다.


바람이 얕은 숨소리처럼 불었다.
전구의 불빛은 조금씩 흔들렸고 우린 안주 거리를 꺼내어 야외테이블에 맥주와 함께 올려놓았다.
어둠과 한기를 물리칠 원초적인 불도 피웠다.
전구와 불은 우리의 가시거리를 넓혀주었고 그와 난 술 한잔 하며 불안함을 잠재우고 있었다.


비가 떨어졌다.
단단한 바람이 불어와 빗방울을 사선으로 휘어버렸다.
타오르는 불길의 붉은 손은 낙하하는 빗방울을 움켜 쥐자마자 다시 공중으로 증발시켜 올려 보냈다.
잠시 바람소리와 장작이 타는 소리, 비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만이 그와 나의 대화를 잡아먹었다.


갑자기 그가 어둠 속 한 곳을 응시했다.
나도 그의 시선에 기대어 같은 곳을 바라봤다.
숙소 건너편 검게 칠해진 풍경 속에 커다란 야자수가 있었다.
그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듯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바람 부는 대로 야자수 잎들이 뒤틀렸다.
기괴한 형상이었다.
그와 나는 거기서 그만 시선을 거두어야 했었다.
하지만 4개의 눈은 고정된 채로 야자수와 바람이 함께 추는 춤을 지켜봐야만 했다.
어둠에 적응한 눈은 더욱 밝아졌다.


그것은 더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우리는 홀린 것처럼 눈을 떼지 못했고 잠시 후 소름이 온몸의 피부를 깨웠다.
눈을 떼자마자 우리 앞의 가장 밝고 뜨거운 장작불로 시선을 고정했고 멍하니 지켜만 봤다.




아직도 가끔 그때 찍은 야자수 사진을 볼 때면 그가 한 말이 생각난다.
머리를 풀어헤친 봉두난발의 여자가 미친 듯이 머리를 돌리는 모습이었다고.
그에겐 제주의 무서운 밤이 처음이었고 난 아니었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가 매년 제주를 다시 찾아가고 그리워하는 이유가 맛있는 회와 아름다운 자연과 낯선 지역에 대한 모험심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앞에서 춤을 추던 야자수에 홀려서일까?
그도 그럴 것이 다음 해에 우린 그 야자수를 찾아가 이야기하고 사진도 찍었다.

제주도 여행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꾸 생각이 나고 다시 짐을 챙겨서 떠나고 싶어 진다.
그때 알았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제주가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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