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활주로는 제주로

고등어회는 제주

낮가림 2022. 1. 26. 23:27
반응형

 



서울에서 태어나 40년 이상을 한 동네에서만 지내왔다.
사진을 찍어 두진 않았지만 점점 변화하던 동네의 모습을 기억한다.
비디오 가게였던 곳은 책 대여점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세탁소가 되었다.
텃밭이었던 땅은 커다란 빌라건물이 세워졌다.
모든 게 하나씩 변해갔다.
너무 오래 살던 동네라서 성인이 된 후에는 일터와 집만 왔다 갔다 반복했었다.
그러다 여유시간이 생기면 동네를 산책했는데 처음 보는 낯선 건물들이나 가게가 생겨있었다.
예전에는 아주 천천히 변화가 일어났다면 지금은 개업한지 얼마 안돼서 폐업하고 바로 다른 간판이 올려졌다.
그만큼 사랑받는 자영업자가 되긴 힘들었고 더이상 내가 알던 동네가 아니었다.

변 할 거라 다짐 했지만 난 변하지 않았다.
이루고자 하는 꿈과 목표가 있었지만 난 이루지 못했다.
그냥 있었으니까. 행동하지 않았으니까.
기대보다 걱정이 많았으니까.
타인의 꿈과 목표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게 더 안전했으니까.
그렇다고 딱히 벌어논 돈도 별로 없었다.
이렇게 살아가는게 보통의 인생이겠구나 생각했다.
그땐 그게 다행이었다.
그래도 보통은 됐으니까.

어느 날 제주도 여행을 갔다 온 친구가 동문시장에서 먹은 고등어회와 갈치회가 그렇게 맛있다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너무 맛있어서 한접시를 또 주문해서 먹었다고.
그때였다. 나도 고등어회가 먹고 싶어졌다.
대체 회로 먹는 고등어는 무슨 맛이란 말인가?
비리지 않을까?
갑자기 내가 먹던 광어회가 맛없이 느껴졌다.
이미 수없이 먹어와서 너무나도 잘 아는 맛과 식감.
이미 수없이 반복해서 너무나도 잘 아는 내 자신.
갑자기 내가 먹던 맛없는 광어회가 나라고 느껴졌다.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길래 나이 40이 넘도록 고등어회 한점 먹어보지도 못하고 살아왔단 말인가.
횟집에서 광어와 우럭을 시켜놓고 우린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먼저 고백한 건 나였다.
" 회 먹으러 제주도나 가자"
진심이었다. 제주도보다 고등어회가 앞서 있었다.
그는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래"

고등어 회를 먹으러 짐을 싼다.
고등어 회를 먹으러 김포공항에 간다.
고등어 회를 먹으러 구름 위를 날아간다.
고등어 회를 먹으러 제주공항에 내린다.
고등어 회를 먹으러 택시를 타고 동문시장에 내린다.
고등어 회를 먹으러 시장을 돌아보고 올레 횟집에 들어간다.
고등어 회를 주문한다.
고등어 회가 나왔다.


고등어가 입속으로 들어왔다.
나의 첫 제주 음식이었고 제주가 나를  향해 던진 미끼였다.
그 미끼는 고소했고 부드러웠다.
내가 낚인건 처음이었고 그에겐 처음이 아니었다.
한 접시를 더 시켜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동문시장을 나와 생소한 풍경들을 보았을 때 비로소야 내가 제주도에 왔음을 실감했다.


바람이 불었고 이제 고등어 회는 내가 아는 맛과 식감이 되어버렸다.
갑자기 내 자신이 맛있는 고등어 회가 되었다고 느껴졌다.
이제 난 스스로 미끼가 되었다.
그를 꾀어서 제주를 모험하리라.
더 오래 더 많이.

제주하면 머가 떠올라?라고 물어본다면 귤도 돌하르방도 아니다.
나에게 고등어회는 제주이다.



'내 활주로는 제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 블로그  (2) 2022.01.29
제주도로 떨어지기  (0) 2022.01.27
제주가 부른다  (0) 2022.01.25
제주의 풍경  (0) 2022.01.24
제주살이  (0) 2022.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