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8

양재천 달리기

그냥 뛰었을 뿐이다. 약 10일 정도 되는 기간 동안 계속 야근 중이다. 생각보다 많이 바빴고 체력적으로 지쳤다. 저녁 7시쯤 퇴근을 하며 길을 걸었다. 날은 벌써 어두워졌다. 이 시간에 타는 버스는 사람으로 꽉 차있다. 퇴근길 속도를 위해 굳이 비좁은 버스를 타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양재천 육교 밑으로 들어가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걷다 보니 갑자기 뛰고 싶어졌다. 서른 살 초반까지는 늦은 밤에 밖으로 나와 뛰어다녔다. 유일하게 하는 운동이었고 그 덕분에 뛰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늦은 저녁까지 야근을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고, 나의 달리기 취미는 사라져 버렸다. 달린다는 감각은 출근길 전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뛰는 순간만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내가 퇴근길 어두운 양재천 길 위에..

생각의 시작은 제주

삶의 속도는 나를 점점 빠르게 제주로 밀고 있다. 아직 더위나 폭염이 남았을 거 같지만 어제오늘은 날씨가 선선하다. 심지어 새벽에 잘 때는 살짝 깨어서 이불을 단단히 덮고 써큘레이터의 바람세기를 낮춰야 했다. 날이 덥지 않아서 좋기는 하지만 피부에 전해지는 공기의 온도만으로도 삶의 속도가 느껴진다. 이제 곧 가을과 추석이 오고 차가운 겨울이 오겠구나 하는 생각. 내년이면 나이 한 살을 더 먹는데 지금 난 잘하고 있는 걸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물음. 잠시 몸을 움직여서 땀이 나고 덥기는 했지만 가만히 않아 있으니 사무실 에어컨에서 부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진다. 문득 선풍기와 에어컨에서 부는 바람은 시작점이 있는데 제주에서 부는 바람은 시작점이 과연 어디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거칠고 거대한 광풍이 사방..

에어컨 바람과 제주

여름을 여름처럼... 나는 집에 에어컨이 없다. 무더운 여름의 한 낮과 눅눅한 열대야 밤에는 딱 오징어 숙회처럼 말랑말랑 해져있다. 몸이 그렇게 뻗어버리니 정신이 말짱 할리가 없다. 천장만 쳐다본 채로 어서 온도가 식기를 기다릴 뿐이다. 가끔 너무 더울 때는 어느 겨울날, 출근길에 체험한 가장 추운 한기를 기억과 감각 속에서 꺼내온다. 짧은 순간이지만 영하의 온도를 몸속에 비축한다. 나의 뇌는 겨울과 여름을 오가며 계절에 속고 또 속는다. 머리 위에는 벽걸이 선풍기가 돌아가고 바닥에는 써큘레이터와 휴대용 무선 선풍기가 바람을 불러오고 있다. 3대가 나를 둘러싼 채로 바람을 불어낸다. 에어컨의 냉기보다는 약하지만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대니 기분이 좋다. 눈만 감으면 바로 잠에 들것이다. 나에겐 작은 소망이 ..

제주 그리고 휴식

무엇으로 나를 채울까? 토요일이 저물고 일요일이 왔다. 퇴근이 끝나고 드디어 휴식이 왔다. 3주간의 출근과 야근이 끝났다. 내 몸과 정신은 이제 휴식을 취한다. 오랜만에 포스팅을 한다. 아니 글쓰기라고 하자. 오늘의 휴식이 끝나면 내일부터는 다시 정상적인 근무로 돌아간다. 그동안 구입하고 못 읽은 책도 읽을 수 있고 강의도 들을 수 있다. 제주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도 보고 나의 해방일지도 봐야지. 쉴틈 없는 고단한 시간들을 보내면 아주 작은 사소함 마저도 그리움이 된다. 책 한 페이지 넘길 때 불어오는 작은 바람이 기대가 되기도 한다. 집 앞의 고양이가 한가로이 뒹굴거리는 모습을 보며 여유를 느낀다. 너무 많은 땀을 흘리고 에너지를 소진하니 지금의 난 텅 비어있다. 힘을 모두 잃은 절대반지가 된 기분이..

제주날씨

우리의 삶은 수많은 날씨와 함께한다. 맑음과 흐림. 맑음엔 그다지 이유가 붙지 않지만 흐림엔 비와 눈, 안개, 미세먼지가 붙는다. 그리고 거대한 바람을 동반한 태풍이 오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날씨의 종류는 어느정도 한정되어 있고 우산이나 양산을 준비하는 날과 준비하지 않는 날로 나뉘어져 있다. 복잡할 것 없다. 사람의 마음이나 기분도 날마다 틀리다. 행복하거나 우울하거나 보통의 날이 있을 뿐이다. 우울한 날은 더 우울해지지 않도록 마음속에 우산을 펴야한다. 우울에 젖어들수록 몸이 느끼는 찝찝함은 더 기분나빠진다. 슬픔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성장시켜주는 시간인 것은 맞지만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나의 성격 자체가 되버린다. 얼마전 부터 날씨앱의 위치를 내가 사는 곳이 아닌 제주시로 지정해 놓았다. 내..

To. 제주에게

제주야. 잘 지내고 있니? 서울은 봄이 옆자리에 앉아서 조금 따뜻해. 사실은 오랜만에 얼굴 보러 가려했었어. 근데 시간이 안나더라. 너무 보고 싶은데 미안해. 요새 입맛이 없어서 네가 내어준 싱싱한 회들이 생각나. 활어 물회에 밥 말아먹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어. 아침 산책 후에 네가 만들어준 고기국수도 얼마나 담백하고 고소했는지. 네가 직접 착즙한 한라봉 에이드도 정말 시원하고 달았어. 여기 서울은 고층 건물로 꽉 막혀있어서 많이 답답해. 네가 직접 키운 농작물로 가득한 시원한 푸른 밭이 보고 싶다. 밭 사이로 난 길에 가만히 서있으면 향긋한 풀내가 코끝으로 몰려들었지. 그 산뜻한 기분이 하루 종일 갔었어. 네가 비밀스레 꾸미던 곶자왈도 또 들어가 보고 싶어. 햇빛이 들지 않는 야생의 숲이 그렇게 ..

살고 싶은 고향땅 제주

2020년, 우리를 잠시 스쳐 지나갈 거라 믿었던 코로나가 발걸음을 멈춰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내 주변의 일상은 변화를 견뎌내야 했고 견뎌내지 않으면 무너져야 했다. 적지 않은 삶이지만, 짧은 몇 달 만에 삶은 축소되었고 그 작은 테두리 안에서 새로운 습관들로 살아야 했다. 출근과 퇴근은 위험한 행동이었고 그러지 않아도 되었던 사람들은 재택근무를 하였다. 밥 먹고 커피 한잔 마시는 여유 외에는 하루 종일 얼굴의 반만 가린 가면, 마스크를 써야 했다. 흐르는 땀과 답답한 호흡... 견뎌야 했다. 그리고, 휴가철이 돌아왔을 때 친구와 난 제주도로 떠났다. 나에겐 첫 제주도였고 친구에겐 아니었다. 바람 불던 그 도로 위에서 우린 마스크를 벗었고, 거센 바람을 들숨처럼 들이마셨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블로그 이야기의 출발은 제주로부터 시작됐다

블로그 이야기의 출발 나와 친구는 제주도 동쪽의 이름 모를 도로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형체 없는 바람이 그 무엇보다 거친 부드러움으로 나를 지나온 길 뒤로 밀어내었다. 살아내면서 지금껏 느끼거나 본 적 없었던 텅 빈 도로 위 바람의 풍경은 너무나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바람의 세기는 점점 얕아졌지만 나를 지나간 것이 아니라 내가 바람을 마셔버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제주의 그 바람은 그 후로 내 안에서 멈추지 않고 불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낯설고 기묘한 제주의 모습은 오랜 시간 내가 발을 올려두었던 서울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너무나 익숙해진 서울과 달리 제주는 모든 것이 호기심이었다. 며칠 후 우린 제주를 떠났다. 제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이제부터 내가 풀어갈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