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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날씨

우리의 삶은 수많은 날씨와 함께한다. 맑음과 흐림. 맑음엔 그다지 이유가 붙지 않지만 흐림엔 비와 눈, 안개, 미세먼지가 붙는다. 그리고 거대한 바람을 동반한 태풍이 오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날씨의 종류는 어느정도 한정되어 있고 우산이나 양산을 준비하는 날과 준비하지 않는 날로 나뉘어져 있다. 복잡할 것 없다. 사람의 마음이나 기분도 날마다 틀리다. 행복하거나 우울하거나 보통의 날이 있을 뿐이다. 우울한 날은 더 우울해지지 않도록 마음속에 우산을 펴야한다. 우울에 젖어들수록 몸이 느끼는 찝찝함은 더 기분나빠진다. 슬픔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성장시켜주는 시간인 것은 맞지만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나의 성격 자체가 되버린다. 얼마전 부터 날씨앱의 위치를 내가 사는 곳이 아닌 제주시로 지정해 놓았다. 내..

친구가 제주에 간다

내일 친구가 당일치기로 제주에 간다. 듣기만 해도 설레인다. 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훌쩍 떠나갈 수 있는 그의 여유가 부럽다. 목적지도 아무 계획도 없이 그냥 가는 것이다. 그저 하루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계획되지 않은 여행은 그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정해진 것이 없을 때 우리의 행동은 생각이 아닌 본능으로 움직인다. 의도하지 않은 사건과 장소에 닿을 것이고, 그의 세계는 더욱 확장될 것이다. 그저 부러울 뿐이다. 누군가의 하루가 어떤이의 날보다 더 의미있었다고 비교 할 수는 없지만 그의 내일은 아름다운 날이다. 내일 날씨는 비가 내릴 수 있지만 그는 모든 걸 받아들인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제주에서 모든 걸 채워오기 위해 그는 배와 머리를 비우고 갈것이다. 오랜만에 먹는 고등어회로 배를 채우고..

제주에서 명상을 하자

나는 제주에서 명상을 꿈꾼다. 숲과 동네를 산책하는 일도 좋지만 그냥 아무생각없이 하루의 반나절을 여유롭게 명상에만 쓰고 싶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 평상이나 의자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막지 않은 채로 흔들리며 그렇게 내 생각을 들여다보고 싶다. 그 작은 시간으로 깨어남을 바라는게 아니라 사적인 공간이 아닌 자연 앞에 개방된 공간에서 명상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바쁜 서울의 생활속에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시간을 채우려던 나는 시간을 비우는 방법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수많은 생각들이 항상 나의 삶에 간섭을 한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를 모두 반갑게 받아들이고 같이 망상에 빠져든다. 문제는 오늘 나를 찾아온 이들은 어제도 나를 찾았고 몇 달전에도 나를 찾았으며 몇 년전에도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왔다는..

아이유와 제주 청수곶자왈

발밑에 닿는 느낌이 촉촉하다. 빗물에 젖은 이끼와 야생의 풀들이 낯선 방문자에게 소리없이 감각으로 전해주는 듯하다. 황토색 흙바닥 곳곳엔 말의 배설물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와 나는 지뢰게임을 하듯이 발밑에 시선을 집중하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 길을 벗어나자 숲의 전경이 보였다. 한경면 청수리 청수곶자왈. 제주어로 곶은 숲, 자왈은 덤불을 뜻하고 수풀과 덤불로 이루어진 야생의 숲을 말한다. 이 숲을 처음 알게 된것은 KBS에서 방송한 힐링다큐 나무야나무야를 통해서다. 가수 아이유가 출연한 방송이었다. 아이유의 감성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던 비오는 곶자왈의 풍경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 가보자. 아이유가 방문한 장소로 여행의 테마를 잡았고 첫번째가 삼다수숲, 두번째가 청수곶자왈이었다. 삼다수 숲이 ..

제주에서의 기억을 지우자

기억을 지워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제주에서의 과거를. 모두 지워야만 추억하지 않고 지금을 살 수 있다. 난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뒤로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마다 한달이다. 과거를 돌아보며 알게 된 사실은 실제 제주에 있었던 날은 열흘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날들을 반복적으로 추억한 시간들을 합한 날이 훨씬 길었다. 난 걱정과 후회도 아닌 과거의 기쁨을 만끽하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한 것이다. 행복한 추억과 경험이었지만 내가 제주를 향해 나아갈 때마다 힘이드는 날은 과거의 추억을 불러와 대리만족으로 끝내버릴 것이다. 지금의 나에겐 추억은 중요하지 않다. 살아보지 않은 미래 또한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순간 내가 제주에 있다는 현실인식이 필요할 뿐이다. 서울의 탁한 공기가 아니라 바람이 섞여 물처럼 ..

제주를 상상하기

제주가 있다. 방바닥 위에. 난 관찰자가 되어 항공샷 시점으로 제주를 둘러본다. 미니어쳐가 된 가상의 제주. 상상의 영역이 확장되며 제주 주위의 방바닥도 파란 바다로 물들어간다. 서쪽하늘에 손을 올리자 비자림에 거대한 그늘이 진다. 손가락으로 숲을 한번 쓰다듬어 준다. 촉각도 상상으로 느껴본다. 나의 작은 제주는 오늘도 평화롭다. 제주를 상상하면 항상 제일 먼저 생각나는 장소가 있다. 바로 첫 숙소가 있었던 송당리. 첫날 비까지 맞으면서 신나게 돌아다녔고 다음날 제주에서의 첫 아침은 전에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고요함과 왜인지 모르지만 청순한 햇살. 그때 그 장소의 온도와 바람에 묻어온 숲냄새. 작은 새끼고양이와 큰고양이가 뒹구는 초록의 잔디밭. 그 모든 풍경과 감각들이 각인 된..

먼지 속의 제주

오늘도 습관처럼 작은 무선청소기를 들고 청소를 시작한다. 방바닥엔 나의 파편들이 있다. 너무 길어져버린 나의 머리카락과 몸에서 떨어져 나온 고생이 있다. 하나하나 남김없이 빨아들인다. 청소기의 소음이 귀를 따갑게 한다. 빗자루 보다 편하지만 기술의 소음을 얻었다. 몇번 왔다갔다하니 깨끗하다. 이제 이불을 깔고 누울 수 있다. 누우려다 방바닥에 머리카락 하나가 보이면 손가락으로 콕 집어 화장실까지 이동한다. 그리고 추락시키기. 내 눈에 보이는 방바닥보다 내 머릿속에서 느껴지는 먼지가 더 많다. 수많은 생각의 파편들. 항상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난 금방 딴생각에 홀리고 만다. 나를 홀린 생각에서 빠져나와 다시 어떻게 제주에서 살것인가에 집중한다. 완성되지 않은 딴생각은 다시 이어지지 못하고 그대로 잊혀지..

제주로 가기 위해 과거를 바꾸다.

노인은 불편한 다리로 의자를 향해 힘겹게 걸어갔다. 삶의 목표가 의자를 향해 있었다. 온몸의 무게를 떨어뜨리듯이 의자 위에 쿵하고 앉아버렸다. 의자가 흔들렸고 나무바닥도 찌그덕거리는 소음이 났다. 노인의 살결은 탄력을 잃었고 눈도 나빠져 잘 보이지 않는다. 오래된 나무의자도 많은 상처가 났고 다리 끝부분이 닳아서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노인과 의자 모두 오래된 존재였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이젠 둘이 서로 한몸처럼 편안해 보였다. 멀리서 보면 다리 6개 달린 신화 속의 켄타우르스처럼 보였다. 노인은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봤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노을이 지는 모습은 똑같다. 하늘 아래의 풍경들이 바뀌었을 뿐이다. 젊었을 적 많은 꿈들이 있었지만 이루지 못하였고 지금은 시골로 내려와 홀로 살아가고 있다. ..

To. 제주에게

제주야. 잘 지내고 있니? 서울은 봄이 옆자리에 앉아서 조금 따뜻해. 사실은 오랜만에 얼굴 보러 가려했었어. 근데 시간이 안나더라. 너무 보고 싶은데 미안해. 요새 입맛이 없어서 네가 내어준 싱싱한 회들이 생각나. 활어 물회에 밥 말아먹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어. 아침 산책 후에 네가 만들어준 고기국수도 얼마나 담백하고 고소했는지. 네가 직접 착즙한 한라봉 에이드도 정말 시원하고 달았어. 여기 서울은 고층 건물로 꽉 막혀있어서 많이 답답해. 네가 직접 키운 농작물로 가득한 시원한 푸른 밭이 보고 싶다. 밭 사이로 난 길에 가만히 서있으면 향긋한 풀내가 코끝으로 몰려들었지. 그 산뜻한 기분이 하루 종일 갔었어. 네가 비밀스레 꾸미던 곶자왈도 또 들어가 보고 싶어. 햇빛이 들지 않는 야생의 숲이 그렇게 ..

나는 내가 지난 여름 제주에서 한 일을 알고 있다.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지난여름 휴가 때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아마도 집구석에서 조용히 일년 치 낮잠을 즐겼을 것이다. 선풍기를 틀어 놓고 잔잔한 바람에 숨을 섞었겠지. 늦은 오후에 무심히 일어나 아무 계획 없이 습관대로 얼음 가득한 냉커피를 타 마시며 더위 먹은 속을 달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 계획 없이 사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을 지켜주는 룰이었다. 그래야 살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사건 사고도 내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어제가 오늘이고 내일이 또 오늘과 같다. 마치 오늘만 사는 삶이다. 살아온 인생 전체를 쪼개고 쪼개 단 하루로 편집하더라도 오늘 하루와 같다. 편집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 똑같은 하루다. 아무 계획이 없으니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남에게 피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