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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와 제주 청수곶자왈

발밑에 닿는 느낌이 촉촉하다. 빗물에 젖은 이끼와 야생의 풀들이 낯선 방문자에게 소리없이 감각으로 전해주는 듯하다. 황토색 흙바닥 곳곳엔 말의 배설물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와 나는 지뢰게임을 하듯이 발밑에 시선을 집중하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 길을 벗어나자 숲의 전경이 보였다. 한경면 청수리 청수곶자왈. 제주어로 곶은 숲, 자왈은 덤불을 뜻하고 수풀과 덤불로 이루어진 야생의 숲을 말한다. 이 숲을 처음 알게 된것은 KBS에서 방송한 힐링다큐 나무야나무야를 통해서다. 가수 아이유가 출연한 방송이었다. 아이유의 감성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던 비오는 곶자왈의 풍경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 가보자. 아이유가 방문한 장소로 여행의 테마를 잡았고 첫번째가 삼다수숲, 두번째가 청수곶자왈이었다. 삼다수 숲이 ..

제주에서의 기억을 지우자

기억을 지워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제주에서의 과거를. 모두 지워야만 추억하지 않고 지금을 살 수 있다. 난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뒤로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마다 한달이다. 과거를 돌아보며 알게 된 사실은 실제 제주에 있었던 날은 열흘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날들을 반복적으로 추억한 시간들을 합한 날이 훨씬 길었다. 난 걱정과 후회도 아닌 과거의 기쁨을 만끽하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한 것이다. 행복한 추억과 경험이었지만 내가 제주를 향해 나아갈 때마다 힘이드는 날은 과거의 추억을 불러와 대리만족으로 끝내버릴 것이다. 지금의 나에겐 추억은 중요하지 않다. 살아보지 않은 미래 또한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순간 내가 제주에 있다는 현실인식이 필요할 뿐이다. 서울의 탁한 공기가 아니라 바람이 섞여 물처럼 ..

제주를 상상하기

제주가 있다. 방바닥 위에. 난 관찰자가 되어 항공샷 시점으로 제주를 둘러본다. 미니어쳐가 된 가상의 제주. 상상의 영역이 확장되며 제주 주위의 방바닥도 파란 바다로 물들어간다. 서쪽하늘에 손을 올리자 비자림에 거대한 그늘이 진다. 손가락으로 숲을 한번 쓰다듬어 준다. 촉각도 상상으로 느껴본다. 나의 작은 제주는 오늘도 평화롭다. 제주를 상상하면 항상 제일 먼저 생각나는 장소가 있다. 바로 첫 숙소가 있었던 송당리. 첫날 비까지 맞으면서 신나게 돌아다녔고 다음날 제주에서의 첫 아침은 전에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고요함과 왜인지 모르지만 청순한 햇살. 그때 그 장소의 온도와 바람에 묻어온 숲냄새. 작은 새끼고양이와 큰고양이가 뒹구는 초록의 잔디밭. 그 모든 풍경과 감각들이 각인 된..

먼지 속의 제주

오늘도 습관처럼 작은 무선청소기를 들고 청소를 시작한다. 방바닥엔 나의 파편들이 있다. 너무 길어져버린 나의 머리카락과 몸에서 떨어져 나온 고생이 있다. 하나하나 남김없이 빨아들인다. 청소기의 소음이 귀를 따갑게 한다. 빗자루 보다 편하지만 기술의 소음을 얻었다. 몇번 왔다갔다하니 깨끗하다. 이제 이불을 깔고 누울 수 있다. 누우려다 방바닥에 머리카락 하나가 보이면 손가락으로 콕 집어 화장실까지 이동한다. 그리고 추락시키기. 내 눈에 보이는 방바닥보다 내 머릿속에서 느껴지는 먼지가 더 많다. 수많은 생각의 파편들. 항상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난 금방 딴생각에 홀리고 만다. 나를 홀린 생각에서 빠져나와 다시 어떻게 제주에서 살것인가에 집중한다. 완성되지 않은 딴생각은 다시 이어지지 못하고 그대로 잊혀지..

제주로 가기 위해 과거를 바꾸다.

노인은 불편한 다리로 의자를 향해 힘겹게 걸어갔다. 삶의 목표가 의자를 향해 있었다. 온몸의 무게를 떨어뜨리듯이 의자 위에 쿵하고 앉아버렸다. 의자가 흔들렸고 나무바닥도 찌그덕거리는 소음이 났다. 노인의 살결은 탄력을 잃었고 눈도 나빠져 잘 보이지 않는다. 오래된 나무의자도 많은 상처가 났고 다리 끝부분이 닳아서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노인과 의자 모두 오래된 존재였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이젠 둘이 서로 한몸처럼 편안해 보였다. 멀리서 보면 다리 6개 달린 신화 속의 켄타우르스처럼 보였다. 노인은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봤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노을이 지는 모습은 똑같다. 하늘 아래의 풍경들이 바뀌었을 뿐이다. 젊었을 적 많은 꿈들이 있었지만 이루지 못하였고 지금은 시골로 내려와 홀로 살아가고 있다. ..

To. 제주에게

제주야. 잘 지내고 있니? 서울은 봄이 옆자리에 앉아서 조금 따뜻해. 사실은 오랜만에 얼굴 보러 가려했었어. 근데 시간이 안나더라. 너무 보고 싶은데 미안해. 요새 입맛이 없어서 네가 내어준 싱싱한 회들이 생각나. 활어 물회에 밥 말아먹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어. 아침 산책 후에 네가 만들어준 고기국수도 얼마나 담백하고 고소했는지. 네가 직접 착즙한 한라봉 에이드도 정말 시원하고 달았어. 여기 서울은 고층 건물로 꽉 막혀있어서 많이 답답해. 네가 직접 키운 농작물로 가득한 시원한 푸른 밭이 보고 싶다. 밭 사이로 난 길에 가만히 서있으면 향긋한 풀내가 코끝으로 몰려들었지. 그 산뜻한 기분이 하루 종일 갔었어. 네가 비밀스레 꾸미던 곶자왈도 또 들어가 보고 싶어. 햇빛이 들지 않는 야생의 숲이 그렇게 ..

나는 내가 지난 여름 제주에서 한 일을 알고 있다.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지난여름 휴가 때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아마도 집구석에서 조용히 일년 치 낮잠을 즐겼을 것이다. 선풍기를 틀어 놓고 잔잔한 바람에 숨을 섞었겠지. 늦은 오후에 무심히 일어나 아무 계획 없이 습관대로 얼음 가득한 냉커피를 타 마시며 더위 먹은 속을 달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 계획 없이 사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을 지켜주는 룰이었다. 그래야 살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사건 사고도 내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어제가 오늘이고 내일이 또 오늘과 같다. 마치 오늘만 사는 삶이다. 살아온 인생 전체를 쪼개고 쪼개 단 하루로 편집하더라도 오늘 하루와 같다. 편집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 똑같은 하루다. 아무 계획이 없으니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남에게 피해 주지..

제주

지금의 삶이 내가 꿈꾸던 현실인가? 왜 이렇게 살아가는 방법이 꼬였는지 모르겠다. 오래전에도 부족함 없는 경제적 자립을 원했다. 제주를 알기 훨씬 전부터 말이다. 하지만 입에서 뱉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힘들어... 힘들어 힘들어 할 때마다 삶의 무게는 더 쌓여만 갔다. 어릴 때부터 삶과 일이 힘들다고 나 홀로 소리 내어 독백을 했다. 솔직했지만 그 힘들어는 나이를 먹을 수록 복리 효과처럼 커져만 갔다. 이제 그 힘들어는 어깨와 목을 누르고, 손목을 짓누르며 무릎과 발목을 찍어 내리고 있다. 주문처럼 걸어만 다녀도 힘들어가 나오도록. 최근에 포스팅을 자꾸 빼먹은 이유도 힘들어서다. 이젠 몸이 견디는 수준이 아니라 거부 반응을 하고 있다. 육신이 늙어가는게 아니라 망가져 가고 있다. 좀 쉬어야 회복이 될 ..

제주에서는 아침을 먹자

난 예전부터 아침에는 항상 바빴던 것 같다. 항상 정해진 시간보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 일찍 출근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그 시간을 즐겼다. 하지만 빠른 출근 때문에 아침을 항상 굶어야만 했다. 약 10년이 넘는 날 동안 아침을 먹은 날이 다 합쳐서 1달이 될까 말까 한다. 그래서 지금은 아침을 먹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웃기게도 빠른 출근으로 아침식사와 바꾼 것이 커피였다. 엊그제 까지도 아침 시간동안 많으면 약 5잔 이상의 커피를 마신다. 커피가 맛있어서? 추워서? 배고파서? 나도 모르겠다. 매일 습관적으로 커피를 입에 넣게 되었다. 난 제주에서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하늘을 보며 깨어날 것이다. 음악을 틀고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적당한 양의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요..

제주 걱정

난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하루 종일 걱정에 둘러싸여 산다. 머릿속 크고 작은 걱정들이 소중한 내 시간들을 잡아먹는다. 출근하기 전 나는 가스밸브의 방향을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본다. 그리고 가스레인지의 손잡이들을 모두 하나씩 일일이 만져본다. 눈으로만 봐도 확인이 되지만 보이는 것만을 믿지 않는다.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안에 든 물건들을 하나씩 만져본다. 분명 눈으로 보지않고 그 물건의 크기, 촉감, 무게, 위치 순으로 확인한다. 물건의 위치가 바뀌어 있으면 손으로 다시 완벽한 위치를 찾아 준다. 가방 속에는 빗, 지갑, 교통카드지갑, 버즈라이브 무선이어폰 케이스 밖에 들어있지 않다. 고작 몇 가지의 물건을 확인하느라 온 신경을 손의 촉감에 집중한다. 모든 물건의 생존을 확인하고 나면 문을 열고 출근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