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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로 떨어지기

항상 무언가를 시도하고자 했다. 그림도 그리고 싶었고 글도 쓰고 싶었다. 옷도 만들려 했고 작은 사업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시작부터 엎어야 했다. 몇 년째 진행 중인 개인적인 아픈 손가락도 있다. 이 모든 원인이 완벽을 추구했던 지랄맞은 성격과 태도 때문이다. 반지하에 살던 어린시절의 나에겐 놀거리라곤 하얀 스케치북 또는 A4 크기의 복사용지, 아끼던 반투명한 기름종이와 연필과 볼펜뿐이었다. 그땐 글을 잘 몰랐고 할 수 있는 건 그림을 그리는 것과 낙서뿐이었다. 그당시 유행했던 건담 카드, 호돌이, 만화책의 한 페이지 등 그릴 수 있는 건 다 따라 그렸다. 모양과 선하나 점하나 디테일하게 따라 그리다 보니 어느새 똑같이 복사하는 실력이 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다. 친..

고등어회는 제주

서울에서 태어나 40년 이상을 한 동네에서만 지내왔다. 사진을 찍어 두진 않았지만 점점 변화하던 동네의 모습을 기억한다. 비디오 가게였던 곳은 책 대여점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세탁소가 되었다. 텃밭이었던 땅은 커다란 빌라건물이 세워졌다. 모든 게 하나씩 변해갔다. 너무 오래 살던 동네라서 성인이 된 후에는 일터와 집만 왔다 갔다 반복했었다. 그러다 여유시간이 생기면 동네를 산책했는데 처음 보는 낯선 건물들이나 가게가 생겨있었다. 예전에는 아주 천천히 변화가 일어났다면 지금은 개업한지 얼마 안돼서 폐업하고 바로 다른 간판이 올려졌다. 그만큼 사랑받는 자영업자가 되긴 힘들었고 더이상 내가 알던 동네가 아니었다. 변 할 거라 다짐 했지만 난 변하지 않았다. 이루고자 하는 꿈과 목표가 있었지만 난 이루지 못했다...

제주가 부른다

2020년 첫 제주도 여행의 밤은 정말 기묘했다. 넓은 평지에 우뚝 솟아 오른 오름의 모습은 거인의 무덤 같기도 했다. 숙소로 걸어서 돌아가는 길 유일한 이정표는 불켜진 주택이었다. 나에겐 어둠이 내린 제주의 밤은 처음이었고 친구는 아니었다. 어둠을 눈으로 더듬으며 조금씩 앞으로 헤쳐나갔다. 뒤돌아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그대로 어둠이 밀려와 있었다. 저 멀리 숙소의 마당에 걸어 놓은 전구의 불빛이 보였고 우리는 무사히 밝음에 몸을 노출시켰다. 온몸에 묻어있던 어둠은 살며시 씻겨 내려갔다. 바람이 얕은 숨소리처럼 불었다. 전구의 불빛은 조금씩 흔들렸고 우린 안주 거리를 꺼내어 야외테이블에 맥주와 함께 올려놓았다. 어둠과 한기를 물리칠 원초적인 불도 피웠다. 전구와 불은 우리의 가시거리를 넓혀주었고 ..

제주의 풍경

밝은 햇살에 눈이 자연스럽게 떠진다. 상체를 침대에서 일으킴과 동시에 온몸의 근육을 조금씩 풀어준다. 2층에서 1층으로 나무계단을 내려가며 주위를 둘러본다. 오름처럼 보이는 언덕사이로 뿌연 안개가 가득하다. 커피포트의 물을 끓이고 커피 한잔을 만들어 낸다. 식탁 위에는 따뜻한 커피의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난 홀린 듯이 밖의 풍경에 멍하니 시선을 빼앗긴다. 거실 구석에선 함께 여행을 온 친구가 몸이 아파 끙끙거리고 있다. 전날 숙소의 야외 자꾸지에서 물놀이를 즐기더니 몸살에 걸린 모양이다. 두통약 하나를 건네주고 다시 낯선 풍경에 시선을 맡긴다. 생각해보니 전날 동네를 모험했을 때 약국은 발견되지 않았고 보건소도 문이 닫혀있었다. 비상약을 챙겨오지 않았다면 친구는 하루 종일 두통과 몸살로 고생했을 ..

제주살이

21년 여름. 제주도 숙소 안에서 난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살려면 어떻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이 자연 속에 머무를 수 있을까? 여기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 거지? 여행자의 생각과 살아가는 현지인들의 마음은 틀리겠지? 어지러운 생각 중에 잠이 들고 다음 날 아침 숙소 앞에서 푸르게 펼쳐진 이 장면을 봤을 때... 아... 고민 할거없이 살아야겠구나. 행동해야겠구나. 내가 가진 돈으로는 현재 제주에 정착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내려와서 연세로 집을 얻고 일자리를 찾아서 적응한다면 살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고 싶은 삶은 그런 삶이 아니다. 내려가기 전에 이미 원하는 직업과 어느 정도 고정된 벌이를 가지고 정착하는 것이다. 가서 이것저것 부딪..

서울에서 제주로

떠나야 했다. 다시 한번 제주로. 2021년 여름, 구름 위에서 제주를 내려다보았다. 1년 만이다. 꼭 다시 와보고 싶었다. 바람을 함께 맞던 그 친구와 다시 제주도로 돌아왔다. 난 두 번째 제주였고 친구는 아니었다. 제주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 의문은 확신이 되었다. 그래. 난 여기서 살고 싶은 게 맞다. 5박 6일의 휴가를 마치고 친구와 난 제주에서 서울로 귀환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말을 했다. "나 제주도 가서 살래." 그는 내가 아직 여행자의 감정에 취해있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난 솔직했고 그 생각과 계획들을 빨리 공유하고 싶었다. 내 말이 헛소리였다면 그는 날 놀리고 장난을 쳤을 테지만 사뭇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나를 격려하고 있었다. 그래. 갈 수 있어. 난 다짐했다. 다시 ..

살고 싶은 고향땅 제주

2020년, 우리를 잠시 스쳐 지나갈 거라 믿었던 코로나가 발걸음을 멈춰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내 주변의 일상은 변화를 견뎌내야 했고 견뎌내지 않으면 무너져야 했다. 적지 않은 삶이지만, 짧은 몇 달 만에 삶은 축소되었고 그 작은 테두리 안에서 새로운 습관들로 살아야 했다. 출근과 퇴근은 위험한 행동이었고 그러지 않아도 되었던 사람들은 재택근무를 하였다. 밥 먹고 커피 한잔 마시는 여유 외에는 하루 종일 얼굴의 반만 가린 가면, 마스크를 써야 했다. 흐르는 땀과 답답한 호흡... 견뎌야 했다. 그리고, 휴가철이 돌아왔을 때 친구와 난 제주도로 떠났다. 나에겐 첫 제주도였고 친구에겐 아니었다. 바람 불던 그 도로 위에서 우린 마스크를 벗었고, 거센 바람을 들숨처럼 들이마셨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블로그 이야기의 출발은 제주로부터 시작됐다

블로그 이야기의 출발 나와 친구는 제주도 동쪽의 이름 모를 도로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형체 없는 바람이 그 무엇보다 거친 부드러움으로 나를 지나온 길 뒤로 밀어내었다. 살아내면서 지금껏 느끼거나 본 적 없었던 텅 빈 도로 위 바람의 풍경은 너무나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바람의 세기는 점점 얕아졌지만 나를 지나간 것이 아니라 내가 바람을 마셔버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제주의 그 바람은 그 후로 내 안에서 멈추지 않고 불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낯설고 기묘한 제주의 모습은 오랜 시간 내가 발을 올려두었던 서울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너무나 익숙해진 서울과 달리 제주는 모든 것이 호기심이었다. 며칠 후 우린 제주를 떠났다. 제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이제부터 내가 풀어갈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