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256

제주를 쫓느라 서울을 잊었다

일요일 아침. 원래대로라면 토요일까지 일한 피로를 덜기 위해 오전 내내 잠을 잔다. 그러나 웬일인지 일찍 잠이 깨었다. 정신이 맑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시간이다. 베지밀 에이 두유를 마시면서 어항 속 공기방울 소리를 듣는다. 그동안 물고기가 존재했다는 것도 잊은 채 관심을 끄고 살았다. 자기 계발과 명상, 주식, 브랜딩, 부업, 창업에 관한 책과 유튜브 영상들을 찾아보느라 집안의 다른 존재에 대해선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구피들이 계속 새끼를 낳았고 지금은 어항을 가득 채웠다. 예전에는 구피가 새끼를 낳으면 은신처를 마련해주고 작은 통으로 멸치보다 작은 아이들을 하나씩 잡아 새끼들만 살 수 있는 미니어항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조금씩 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시간이 흐르자..

제주 타이머

제주로 이주해 살게 된다면 서울의 집에서 가져가야 할 나의 물건들이 있다. 그것이 단순히 짐이라면 다 서울에서 정리해서 버리고 가겠지만 손으로 항상 만지고 눈으로 확인하는 물건들이다. 제주집(제주집이라고 말하니 설렌다)에서 살게 되면 최소한의 물건과 인테리어를 한 채로 비워진 공간에 음악을 크게 틀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래서 몇 장 안되지만 그동안 모아놓은 LP판들을 가지고 갈 생각이다. 정작 현재는 LP판을 재생시킬 수 있는 턴테이블이 없다. 그런 상황이라 한 번도 재생을 못했다. 아쉽지만 제주집에서는 꼭 음악이 담긴 LP판을 플레이시키고 싶다. 턴테이블도 맘에 드는 것으로 사야지. 그 외에도 꽤나 모아둔 음악 CD들과 몇 권의 책들, 작은 소품과 옷가지 정도. 소품 중에 하나가 타이머다. 예전에 한..

퇴사하면 제주로 간다

오늘은 월급날이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토스 앱을 누르고 통장에 입금된 월급을 확인했다. 남은 현금을 확인하고 주식에 얼마를 넣을 수 있는지 가늠해봤다. 퇴근길에 은행에 들러 ATM님의 몸에서 돈을 뽑았다. 손으로 만져지는 아날로그 화폐를 소중히 주머니에 넣은 뒤 집에 계신 부모님에게 생활비로 드렸다. 씻고 나와 라면 물을 올리고 유튜브 영상을 찾아봤다. 회사를 나온 퇴사자들의 생존에 관한 인터뷰였다. 그들은 회사가 정한 틀이 아닌 자신이 세운 기준으로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을 찾아서 했다.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든 이도 있었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기업과 협업을 하거나 같은 생각을 하는 구성원끼리 모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재미난 삶을 살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성장하기까지 많은 난관과 두려움이 있었..

제주는 나의 구멍을 메꿔줄 것이다

새벽부터 빗소리가 들렸다. 자다 깨어 냉수 한 잔으로 목마름을 채우고, 잠시 귀 기울이다 기분 좋은 감정으로 다시 잠이 들었다. 몇 시간 후 우산을 쓰며 출근길을 나섰고 비가 고인 길 위를 걸어야 했다. 일터에 도착했을 때는 양말과 신발이 모두 젖어있었다. 양말 뒤꿈치에는 작은 구멍이 나있었다. 젖은 신발도 밑창에 구멍이 나서 많이 축축했다. 다행히 예비용 신발이 있어서 갈아신었다. 기분 나쁜 축축함이 사라졌다 나는 사실 출근 준비를 하면서 양말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기에 다른 양말을 찾을 여유 없이 그대로 신고 나왔다. 그리고 신발 밑창에 구멍이 났다는 것도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자다 깬 새벽 두발과 맞닿는 지면이 물에 젖어있음을 짧은 순간이나마 인지했다. 그럼에도 나는 구멍..

에어컨이 숨 쉬는 계절에는 제주로 가야한다

오늘은 날이 꽤나 더웠다. 초여름의 습함을 경험했다. 예상치 못한 뜨거운 날씨 앞에서 모두가 힘이 빠져버렸다. 내 마음속에서는 어서 모든 걸 정리하고 제주로 떠나가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서 차가운 커피 한 잔을 하고 싶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고 눈을 감은 채로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나는 삶을 바꾸고 싶었다. 걱정이다. 걱정하면 안되는데 걱정이다. 우리 집엔 에어컨이 없다.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집엔 에어컨이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부채와 선풍기로 살아왔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매년 덥다고 하면서도 암묵적인 룰인지 부모형제 그 누구도 에어컨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기록적인 더위를 기록했던 오래전 여름의 어느 새벽엔 자다가 깬 적이 ..

제주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제주를 배경으로 삶을 풀어내는 드라마가 나왔다. tvN 드라마인데 넷플릭스에 오늘 확인해보니 1, 2화가 올라와 있다. 제주를 떠나 도시에서 살던 한수라는 인물이 다시 고향 제주로 내려가면서 이제는 성인이 돼버린 동창 친구들과 만나며 일어나는 이야기다. 이병헌, 차승원, 한지민, 신민아, 김우빈, 김혜자, 고두심, 이정은, 엄정화 배우님등 유명 배우분들이 많이 등장하는 드라마다. 이중 고두심 배우님은 고향이 제주도라서 더 잘 맞는 캐스팅이 아닐까 싶다. 각 회차가 주요 인물 몇 명의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옴니버스식 구조다. 첫 화는 차승원, 이정은 배우님들의 이야기였다. 기대한 만큼 연기도 좋았고 제주도의 배경 또한 아름다웠다. 제주사투리를 그대로 대사에 옮겨서 표준어로 자막이 나오는 것이 인상 ..

제주에서 오래 살아야지

나는 이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까? 건강을 관리하며 자유로운 삶을 산다면 100세까지도 가능한 세상이다. 내가 살아온 삶의 시간을 한 번 더 살아가야 한다. 어른이 된 삶의 속도는 호기심 가득한 아이의 시간들보다 빠르다. 그래서 체감상 나는 좀 더 빠른 시간을 살게 될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일하지 않고 삶의 형태를 바꾸어 나간다면 시간을 느리게 붙잡을 수 있다. 그래야 한다. 난 아직 살아보지 못한 일들이 많다.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생애의 마지막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내 삶의 필모그래피에서 힘들게 일만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내 삶을 대표하는 장면들이 그런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과거 수명은 40살이었다. 그때 내가 살았다면 이미 생의 마지막을 살았..

제주는 기회다

나는 내 이야기를 좋아한다. 최근 몇 달 사이 블로그를 하면서 잊고 있었던 나의 잔잔한 추억들을 다시 캐내었고 찾아내었다. 분명 잊고 살았는데 기억은 그대로 어딘가 구석에 처박혀 찾아주기를 기다렸나 보다. 아마도 살아가면서 많은 기억들이 예전 기억들을 뒤로 밀어냈으리라. 그래도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아 주었다. 그것이 불행한 기억이든 좋은 추억이든 그 생각들을 떠올리면 난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과거를 연대순으로 떠올리면 우리 동네의 어느 지점에 도서 대여점과 비디오 가게가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다. 작은 문방구들과 구멍가게가 어디 있었는지, 아이들이 엄마 몰래 찾아가던 오락실들의 위치도 알고 있다. 마치 비밀지도처럼 내 머릿속엔 그 시절의 가게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표시되어 있다. 그립다. 힘..

나는 제주의 흙에 뿌리를 내린다

식물을 심기 위해선 항상 흙을 만져야 한다. 그러다 보니 정말 여러 종류의 흙을 만지고 보게 된다. 완전히 뻘처럼 숨구멍이 없는 진흙 같은 흙이 있고, 크고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섞여 물 빠짐이 좋아 공기 순환이 좋은 흙들이 있다. 진흙 같은 흙에 심긴 식물은 물을 주어도 물이 빠져나갈 물길이 없어서 뿌리가 숨도 쉬지 못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썩고 만다. 흙이 물을 그대로 머금어서 밑으로 내려보내지를 않으니 식물의 뿌리는 익사당하듯이 숨도 못 쉬고 죽어간다. 예전의 내 인생이 그랬다. 내 주변 환경과 집의 분위기, 돈을 버는 직장의 스트레스가 내게 숨을 쉴 여유를 주지 않았고 내 마음과 꿈은 썩어갔다. 퇴근길 지친 다리는 무거웠고 걱정과 불만들을 흘려보낼 곳이 없었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난 구글킵에 제주의 기록을 적는다

내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앱은 구글킵(Google Keep)이다. 단순한 메모 앱이지만 난 그 안에 많은 것을 기록한다. 나의 상상,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일, 가계부, 유튜브나 웹사이트의 링크 그 외에도 잡다한 지식들을 구글킵에 기록해 놓는다. 기록의 중요성은 이미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말한 것 같다. 나도 기록의 힘을 믿는다. 사람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고 어느 순간 창조적인 지혜는 불현듯 찾아온다. 어릴 때는 그 찰나의 지혜를 몇 번씩 외우며 머릿속에 저장해 뒀지만 나이를 먹으니 그러기가 힘들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꼭 연습장이나 메모지 한 장을 찢어서 여러 번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일하다가 나도 모르게 아이디어가 솟으면 볼펜으로 종이에 기록했다. 그런 메모지가 쌓이고 쌓여 엄청나게 많아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