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256

제주로 가기 위해 과거를 바꾸다.

노인은 불편한 다리로 의자를 향해 힘겹게 걸어갔다. 삶의 목표가 의자를 향해 있었다. 온몸의 무게를 떨어뜨리듯이 의자 위에 쿵하고 앉아버렸다. 의자가 흔들렸고 나무바닥도 찌그덕거리는 소음이 났다. 노인의 살결은 탄력을 잃었고 눈도 나빠져 잘 보이지 않는다. 오래된 나무의자도 많은 상처가 났고 다리 끝부분이 닳아서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노인과 의자 모두 오래된 존재였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이젠 둘이 서로 한몸처럼 편안해 보였다. 멀리서 보면 다리 6개 달린 신화 속의 켄타우르스처럼 보였다. 노인은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봤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노을이 지는 모습은 똑같다. 하늘 아래의 풍경들이 바뀌었을 뿐이다. 젊었을 적 많은 꿈들이 있었지만 이루지 못하였고 지금은 시골로 내려와 홀로 살아가고 있다. ..

To. 제주에게

제주야. 잘 지내고 있니? 서울은 봄이 옆자리에 앉아서 조금 따뜻해. 사실은 오랜만에 얼굴 보러 가려했었어. 근데 시간이 안나더라. 너무 보고 싶은데 미안해. 요새 입맛이 없어서 네가 내어준 싱싱한 회들이 생각나. 활어 물회에 밥 말아먹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어. 아침 산책 후에 네가 만들어준 고기국수도 얼마나 담백하고 고소했는지. 네가 직접 착즙한 한라봉 에이드도 정말 시원하고 달았어. 여기 서울은 고층 건물로 꽉 막혀있어서 많이 답답해. 네가 직접 키운 농작물로 가득한 시원한 푸른 밭이 보고 싶다. 밭 사이로 난 길에 가만히 서있으면 향긋한 풀내가 코끝으로 몰려들었지. 그 산뜻한 기분이 하루 종일 갔었어. 네가 비밀스레 꾸미던 곶자왈도 또 들어가 보고 싶어. 햇빛이 들지 않는 야생의 숲이 그렇게 ..

나는 내가 지난 여름 제주에서 한 일을 알고 있다.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지난여름 휴가 때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아마도 집구석에서 조용히 일년 치 낮잠을 즐겼을 것이다. 선풍기를 틀어 놓고 잔잔한 바람에 숨을 섞었겠지. 늦은 오후에 무심히 일어나 아무 계획 없이 습관대로 얼음 가득한 냉커피를 타 마시며 더위 먹은 속을 달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 계획 없이 사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을 지켜주는 룰이었다. 그래야 살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사건 사고도 내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어제가 오늘이고 내일이 또 오늘과 같다. 마치 오늘만 사는 삶이다. 살아온 인생 전체를 쪼개고 쪼개 단 하루로 편집하더라도 오늘 하루와 같다. 편집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 똑같은 하루다. 아무 계획이 없으니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남에게 피해 주지..

제주

지금의 삶이 내가 꿈꾸던 현실인가? 왜 이렇게 살아가는 방법이 꼬였는지 모르겠다. 오래전에도 부족함 없는 경제적 자립을 원했다. 제주를 알기 훨씬 전부터 말이다. 하지만 입에서 뱉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힘들어... 힘들어 힘들어 할 때마다 삶의 무게는 더 쌓여만 갔다. 어릴 때부터 삶과 일이 힘들다고 나 홀로 소리 내어 독백을 했다. 솔직했지만 그 힘들어는 나이를 먹을 수록 복리 효과처럼 커져만 갔다. 이제 그 힘들어는 어깨와 목을 누르고, 손목을 짓누르며 무릎과 발목을 찍어 내리고 있다. 주문처럼 걸어만 다녀도 힘들어가 나오도록. 최근에 포스팅을 자꾸 빼먹은 이유도 힘들어서다. 이젠 몸이 견디는 수준이 아니라 거부 반응을 하고 있다. 육신이 늙어가는게 아니라 망가져 가고 있다. 좀 쉬어야 회복이 될 ..

제주에서는 아침을 먹자

난 예전부터 아침에는 항상 바빴던 것 같다. 항상 정해진 시간보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 일찍 출근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그 시간을 즐겼다. 하지만 빠른 출근 때문에 아침을 항상 굶어야만 했다. 약 10년이 넘는 날 동안 아침을 먹은 날이 다 합쳐서 1달이 될까 말까 한다. 그래서 지금은 아침을 먹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웃기게도 빠른 출근으로 아침식사와 바꾼 것이 커피였다. 엊그제 까지도 아침 시간동안 많으면 약 5잔 이상의 커피를 마신다. 커피가 맛있어서? 추워서? 배고파서? 나도 모르겠다. 매일 습관적으로 커피를 입에 넣게 되었다. 난 제주에서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하늘을 보며 깨어날 것이다. 음악을 틀고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적당한 양의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요..

제주 걱정

난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하루 종일 걱정에 둘러싸여 산다. 머릿속 크고 작은 걱정들이 소중한 내 시간들을 잡아먹는다. 출근하기 전 나는 가스밸브의 방향을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본다. 그리고 가스레인지의 손잡이들을 모두 하나씩 일일이 만져본다. 눈으로만 봐도 확인이 되지만 보이는 것만을 믿지 않는다.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안에 든 물건들을 하나씩 만져본다. 분명 눈으로 보지않고 그 물건의 크기, 촉감, 무게, 위치 순으로 확인한다. 물건의 위치가 바뀌어 있으면 손으로 다시 완벽한 위치를 찾아 준다. 가방 속에는 빗, 지갑, 교통카드지갑, 버즈라이브 무선이어폰 케이스 밖에 들어있지 않다. 고작 몇 가지의 물건을 확인하느라 온 신경을 손의 촉감에 집중한다. 모든 물건의 생존을 확인하고 나면 문을 열고 출근 길..

메타버스 제주

퇴근이다. 아직 퇴사가 아니다. 그냥 흔한 퇴근이다. 날씨가 서늘할 때는 해도 같이 퇴근하느라 좀처럼 마주칠 일이 없다. 집에 도착하면 완전히 컴컴한 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동으로 불이 켜지고 외출 중으로 설정해놨던 방 온도가 올라간다. 스마트 시스템이란 간편하고 좋은 것이다.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니까. 얼음같이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고 양말을 벗어 세탁통 안으로 던져 넣는다. 답답한 겉옷과 사회에서 어른이라 겉치장한 체면과 자존심까지 서둘러 벗어버린다. 이제 몸에 걸친 건 속옷과 며칠 동안 쌓인 피곤뿐이다. 웬만해선 피곤은 벗겨지지 않는다. 마치 물에 젖은 양말처럼. 힘겹게 벗은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른 후에도 피곤의 무게는 남아 몸 한구석에 걸치고 있다. ..

내가 제주로 가는 건 비밀이다

내가 제주로 가는 건 비밀이다. 친구인 그 외에는 가족이나 주변 지인 그 누구도 모른다. 심지어 제주도 모르고 있다. 조심히 비밀스럽게 마흔이 넘은 어느 날부터 아무도 모르게 일탈을 꿈꾸고 계획 중이다. 사람이 사는 장소와 환경을 바꾼다는 건 거의 모든 걸 바꾸는 거라 생각한다. 지금은 예측할 수 없지만 내가 딱히 애쓰지 않아도 생길 무의식적인 습관도 만들어질 것이고 타지에서 온 이방인이 갖게 되는 방어기제도 생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만큼 제주를 이해하고 편견을 갖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제주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하려 노력 중이다. 또한 왜 제주에 정착했다가 다시 돌아오는지도 자세히 알아보려 한다. 모든 걱정되는 고민거리에 대한 계획을 다 세워놨을 때 정말 어느 날 아무 걱정 없이 짐을 싸서..

제주 인간극장 송당나무 카페

2020년 여름, 그와 나는 송당리로 휴가를 왔고 이른 아침에 산책을 위해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는 고요함. 뻥 뚫린 도로. 지나다니는 차들은 보이지 않는다. 전형적인 제주 구옥들이 모여진 동네의 모습이 아기자기하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산책하기 좋은 날씨다. 송당리 큰 길가로 나온 후 어디로 갈지 잠시 고민한다. 어차피 동네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물어볼 동네 주민들도 안 보인다. 이 시간에 문을 열고 장사를 하는 가게는 한 군데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큰 도로를 건너 직진하기로 한다. 햇살은 뜨겁고 그늘은 누가 지워버린 것처럼 길가에 희미하게 누워있다. 이 넓고 푸른 공간에 오직 그와 나 둘만 있다. 모험이 시작됐다. 물이 바짝 마르고 풀들만 길게 자란 수로의 제방 위에 올라 걷는다. 오랜만에 만..

내 활주로는 제주로

내 활주로는 제주로 카테고리에 25개 이상의 제주에 관련된 내 신비한 경험담과 가상의 미래 그리고 제주에 대한 생각들을 담아내었다. 처음 블로그를 시작할 때의 예상보다 부지런하게 글을 쓴 것 같다. 심지어 일하면서도 무엇을 써야 할까 고민하는 나를 발견한다. 더불어 뒷목이 뻣뻣해지고 아프다. 심적인 부담감이 몸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직은 습관이 아닌 숙제로 여겨지나 보다. 하지만 오직 나만이 풀 수 있는 숙제이고 정해진 답은 없다. 어쨌든 제주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키워드 조합을 포기하고 내 맘대로 제목을 짓고 글을 썼었는데 의외로 키워드 검색으로 많이들 들어와 주셨다. 게다가 첫 번째 글로 노출되는 포스팅들도 있어서 내가 생각한 대로 쭉 가도 괜찮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아직 한 달도 안됐고 누적된 글..